[일사일언] “멈춰라, 행복한 순간아”
멈추고 싶은 순간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장에 있을 때, 응원하는 야구팀이 우승했을 때,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쳤을 때,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사랑에 빠진 순간 등이다. 내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벗어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그 장면 속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
영원하길 바랐던 순간은 언제나 금방 지나가는 법이다. 현실은 영화처럼 아름답지도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나중에 먹었는데 그때 그 맛이 나지 않았고, 단골 맛집이 갑자기 문을 닫기도 했다. 공연장에서 받은 감동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응원하는 야구팀은 사실은 꼴찌를 면한 게 다행이었다. 사랑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싫어 짝사랑을 그만뒀다. 여행 사진을 봤는데, 그때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신춘문예 당선의 기쁨은 잠시, 창작의 고통이 찾아왔다.
반면, 기억하기 싫은 순간은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춘기 허세와 흑역사, 충동구매로 쌓인 신용카드 결제 금액, 안일하게 넘겼다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사소한 실수, 상처를 줬을 때와 상처를 받았을 때, 엄마 아빠가 나이 들었다는 걸 실감할 때, 건강할 줄 알았던 몸이 망가졌을 때, 무모함이 안 통할 때…. 영원하길 바랐던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다. 잊고 싶은 기억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더니,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혔다.
영원한 건 없다고 하지만, 기억이 사라지는 게 싫다. 기억을 영구 보존하면 좋을 텐데. 얼마나 더 많은 이별이 남았을까. 이별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준비할 시간이라도 주면 좋을 텐데. 찰나의 순간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고, 지나가면 되돌릴 수도 없다. 사진이나 영상이 기억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때 그 순간을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않는다. 멈추고 싶은 순간,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다. 행복한 기억으로 만들어서, 마음속에 붙잡아 둬야지. 행복한 기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잊고 싶은 기억은 행복한 기억으로 막는다. 기억이 떠나면 새로운 기억으로 채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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