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산불, 숲에 갇힌 난민들까지 덮쳤다
지역주민 실종 신고는 없어
난민 추정 20여명 시신 발견
“난민이 방화” 주장 영상도
기후변화 영향으로 지구촌 곳곳이 유례없는 산불과 씨름하고 있는 가운데, 튀르키예 국경을 넘어 유럽으로 향하던 난민들이 제때 대피하지 못해 화마의 희생자가 됐다.
23일(현지시간) 그리스 일간 카티메리니 등에 따르면 닷새째 산불이 이어지고 있는 그리스 동북부 에브로스에서 난민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현재까지 20구 이상 발견됐다. 정부의 공식 확인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아테네통신 등 일부 언론은 불에 탄 시신 8구가 추가로 발견됐다고 전했다.
소방당국은 이 지역에서 주민 실종신고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피해자들이 그리스에 불법 입국한 난민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튀르키예 국경에서 멀지 않은 에브로스는 에브로스강을 건너 유럽으로 오려는 시리아 및 기타 중동·아시아 난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경로다.
현지 언론들은 신속하게 대피한 마을 주민들과 달리 난민들이 불에 타는 숲에 갇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번 산불로 확인된 사망자 가운데 대다수가 난민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긴급 대피 메시지를 제때 받지 못했을 가능성에 대해 그리스 소방당국은 “그리스어와 영어로 된 산불 긴급 메시지가 외국 네트워크를 포함해 해당 지역의 모든 휴대전화로 전송됐다”고 밝혔다.
난민들로 추정되는 시신이 대거 발견되기 전 온라인에서는 이번 산불이 난민들의 방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영상이 확산되기도 했다. 문제 영상에는 산불이 발생한 항구도시 알렉산드루폴리스의 한 시민이 한 무리의 난민들을 자동차 트레일러에 가둔 채 “이들(난민)이 우리를 불태우려 했다. 산 전체가 그들의 광기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며 난민들을 학살할 것을 촉구했다. 경찰은 난민 13명을 납치하고 불법 구금한 혐의로 이 영상을 촬영한 남성을 포함해 3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파블로스 마리나키스 그리스 정부 대변인은 이런 ‘자경단’의 행위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스 당국은 강풍과 40도를 넘는 고온, 가뭄으로 인해 산불이 더 확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테네국립관측소에 따르면 지난 3일간 에브로스 지역에서만 1538㎢에 달하는 지역이 불탔다. 그리스 동북부의 에비아섬과 키노스섬, 보오티아에서도 41도에 이르는 폭염 속에 강풍을 타고 불길이 빠르게 번지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수도 아테네 인근에서도 산불이 발생해 아테네 외곽 파르티나산과 주택이 불타고 주민들이 긴급 대피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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