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남남
몇개월 전 <K-트롯 페스티벌>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관람했다. 이날 공연은 ‘트로트의 여왕’ 장윤정을 비롯한 방송사 서바이벌 출신 ‘트로트 아이돌’들의 출연이 예정돼 있어, 전국 각지에서 온 차와 사람들로 도로가 통제됐다. 티켓도, 지정 좌석도, 수용 제한도 없는 지방 축제의 맛! 이찬원 팬클럽 틈에 끼어 입장하면서 나는 ‘K트로트’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장르의 이름이 외국에서 유래된 것일지라도 결국 ‘트로트’란 건 이미 ‘한국의 성인가요’만을 통칭하는 것인데…. 굳이 앞에 ‘K’를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세계 속의 K콘텐츠!”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볕에 얼굴이 빨갛게 익은 사회자가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환호와 박수갈채가 이어지자 그는 <오징어 게임 2>의 제작비가 1000억원대라는 것을 말하고, 미국 넷플릭스가 향후 4년간 ‘K콘텐츠’에 3조원을 투자할 거라는 것에 감격하고, 방탄소년단(BTS)의 지민과 정국이 자신과 같은 동네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내 옆에 앉은 관객이 “우리나라, 진짜 이 작은 나라가, 대단한 거야”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K’란 국가 정책 선전의 복잡성을 깔끔하게 묶어주는 간편한 인증 마크가 되었다는 사실을.
내가 속한 국가와 국민성에 감탄하는 것은 삶의 시름을 일시적으로 달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트로트를 듣는 경험과 비슷한 데가 있다. 그 찰나의 달콤함이 각각 ‘국뽕 유튜브’와 ‘행사용 뽕짝’이란 부작용을 낳은 것까지도. 아무튼 그날 나는 흠뻑 한국인이 되어 ‘사랑’이 아닌 ‘싸랑’을 부르짖고, 처음 보는 중년들과 흥을 나눴다.
날이 어두워지자 행사의 종료를 알리는 불꽃놀이가 시작되었고, 얼굴에 취기가 오른 사회자가 등장해 또 한 번 벅차게 외쳤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우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우리의 위대한 대한민국!”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체 막걸리에 취해 비틀대는 내 모습이 위대한 대한민국과 무슨 상관인가? 왜 ‘우리’를 외칠수록 점점 더 남들과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인가?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드라마 <남남>은 10대 미혼모였던 은미와 그의 딸 진희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서로가 서로의 전부였던 두 모녀는 연애와 직장, 사회적 사건들에 영향을 받으며 관계의 변화를 겪는다. 그러다 진희의 생부 진홍이 30년 만에 나타나고, 은미가 그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두 모녀의 갈등은 극에 달하고 그 원인 또한 수면 위로 드러난다.
살면서 발생하는 많은 불안들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무마해온 모녀는, 더 이상 그런 방식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며 하나뿐인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를 ‘남’으로 인정하고 각자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오랫동안 서로 깊이 의존해온 모녀는 그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진정한 독립을 하게 되고 ‘남’으로 함께하면서 ‘우리’의 행복을 찾는다.
수만명의 관중이 환호하는 K팝 스타의 해외 투어 무대를 보고 나면 기꺼이 그들과 ‘우리’로 묶이고 싶기도 하지만, 그들의 성공이 행정의 실패를 무마하는 것에 동원되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역시 사람은 ‘우리’보단 ‘남’이 되어야 더욱 행복한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의 활약이 국가의 인지도를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인식의 제고가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하기에 ‘국뽕’이란 늘 뒷맛이 공허하며 ‘우리’라는 전략적 관계는 불편하고, 어색하다.
필요할 때만 ‘우리’가 되지 말고, 그냥 철저히 ‘남남’이 되자. 그러면 만물에 ‘K’마크를 달 이유도, 인간이 딱히 위대하거나, 자랑스러워야 할 이유도 없어진다. 헛된 곳에 힘을 쓰지 않는 사회는 서로를 돌볼 여력이 생기고, 그 힘이야말로 진정한 국가의 저력일 것이다.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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