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잘 징징거린다는 것
새로운 프로젝트 준비로 두 달째 ‘글쓰기 감옥’에 갇혀 지내는 중이다. 손에 모터 달렸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일처리가 빠른 편인데, 글쓰기는 예외다. 마음은 급한데 진도는 안 나가니 지인들을 붙잡고 징징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사전에서는 ‘언짢거나 못마땅하여 계속해서 자꾸 보채거나 짜증을 내는 것’을 징징거림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부정적인 뉘앙스를 넘어 팔딱팔딱 생명력 있는 동사로 ‘징징거림’에 의미를 불어넣은 이는 친구 J다. 갱년기를 겪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일상이 피폐해져 가고 있을 때 J가 말했다. “아플 땐 징징거리는 게 최고 명약이야. 언제든 전화해. 나한테 얼마든지 징징거려!” 그리고 “징징거림도 총량이라는 게 있다”고 덧붙였다. 정말 그랬다.
실컷 징징거리고 나면 좀 덜 아팠고, 그 힘으로 한동안은 버틸 수 있었다. 오래전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도 그랬다. “내가 가서 뺨따귀라도 갈겨줄까? 네가 원하면 언제든 해줄게. 나한테 징징거려!” J는 정말 달려갈 기세였다. 그 말이 얼마나 통쾌하고 시원하던지, 웃음까지 빵 터졌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말만으로도 든든한 보험을 든 기분이었다. 이 얼마나 신박한 징징거림인가?
정신분석학자 이승욱 박사는 우울에 대해 ‘분노하지 못한 자의 형벌’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고 스스로 분노를 삭이려고만 할 때 우울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나는 분노의 첫 표출이 ‘징징거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징징거림 자체는 좋은 신호이자 건강하게 문제를 푸는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징징거리되, 누구에게 어떻게 잘 징징거릴 거냐가 관건이다.
징징거릴 상대로 가족은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일상을 함께하는 가족 간에는 지구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운전도 가족한테는 못 배운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우리 가족은 안 그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타고난 복이니 마음껏 하시길.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먼저 징징거릴 대상을 잘 찾아보자. 꼭 절친일 필요는 없다. 비슷한 경험을 해봤다면 긴 말 필요 없이 공감이 잘 될 테니 금상첨화다.
지인 중에 없다면 커뮤니티를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후배 중 한 명은 종종 전문 상담소를 애용한다. 대면하는 게 부담스러우면 전화상담으로도 충분하다. 징징거릴 때 중요한 건 ‘실컷’의 정도를 잘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 세상사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여기에도 포함된다. 효과를 보고 나면 나도 누군가의 징징거림을 들어줄 수 있는 품이 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어지기도 한다.
분노와 징징거림이 필요하다고는 했지만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경우라면 경중에 상관없이 용납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다만, J의 말처럼 사람마다 징징거림의 총량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건 이걸 받아줄 부모, 교사, 어른이 부재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징징거려서 해소될 수 있는 소소한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즘 끊임없이 이어지는 심란한 뉴스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아, 의식의 흐름대로 가다 보니 어느새 나라 걱정까지 왔다. 오지랖이 끝이 없다. 내 글쓰기 진도가 안 나가는 이유다.
남경아 <50플러스 세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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