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이럴 줄 몰랐다

기자 2023. 8. 2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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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1990년대.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작으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하나둘 무너졌다. 빨갱이 국가 중공과 수교도 했고 그 무렵 해외여행도 완전 자유화됐다. 대학가에는 ‘해외 배낭여행’이란 이름의 여행상품 광고가 곳곳에 붙었고, ‘어학연수’란 것도 유행했다. 아직도 촌스러운 구석이 없진 않았지만 세계화의 흐름을 빠르게 좇아가고 있다는 느낌의 시대였다.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그런 어느 날, 지도교수님을 찾아뵀다. 학부 때인지 석사과정 때인지도 까물까물한 꼬마 시절, 무슨 심부름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 교수님 방문을 노크하며 들어왔다. 일본 T대의 한국사 교수님이, 사전 약속은 없었으나 한국 방문 김에 인사드리겠다고 온 것이었다. T대 교수님이라니, 당연히 자리를 비켜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터, 예상치 않게 지도교수님께서 “지금 학생이랑 상담 중이니 다음에 들러달라”며 문전 박대를 하시는 게 아닌가! 나 같은 학생이 뭐라고 T대 교수님을 박대하시나 싶은 데다, 그 교수님이 가신 후 내게 하신 말씀이 더 이상했다. 지도교수님은 어깨를 으쓱하시며 “요샌 T대 사람들도 한국사를 공부하려면 우리 과 학술지부터 챙겨 봐요”라고 하셨다.

그땐 이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외국에서 한국사 공부를 하려면 당연히 우리 과 학술지를 보겠지, 그게 뭐라고 저렇게 말씀을 하신 것일까? 이게 이해가 된 건 몇달 전 1960년대 나온 논문 한 편을 읽으면서였다. 그 글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경성제대 교수 출신인 일본인 학자가 해방 후 한국에서 처음 나온 한국학 학술지를 읽어보고선 자기들이 깔아놓은 ‘레일’ 위를 달리고 있으니 일제강점기 자기들이 한 연구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평했다는 것이다. 그제야 30년 전 지도교수님의 뜬금없는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지도교수님이 막 공부를 시작했던 1960년대, 식민지배를 한 일본인 학자가 “해방했어도 한국 연구 별거 없네”라고 평한 걸 보고 분기탱천하셨을 그 마음을, 그래서 그사이 성취하신 것에 대해 어린 제자 앞에서 힘주어 말씀하고 싶으셨다는 것을 말이다.

그 시절엔 솔직히 지도교수님이 좀 촌스러워 보였다. 학생 앞에서 센 척하고 싶으셨던 걸까 싶어서 말이다. 1990년대는 식민지 지배 책임을 나름 인정한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도 나온 시대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식의 망언이 툭툭 나오긴 했어도 그러다 말겠지 싶었다. 막 공론화되기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여전히 갈등이 있긴 했지만 점차 해결될 것이라 낙관했다. 과거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정리되는 게 역사의 순리처럼 보였고, 세계화의 긍정성을 의심치 않던 그런 시대, 지도교수님의 태도는 여전히 과거에 얽매인 구닥다리 같아 보였다.

지금 와서 그렇게 낙관했던 마음을 돌이켜보니 어안이 벙벙하다. 도대체 그 후 3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도교수님이 공부를 시작한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그 30년 동안 일어난 일들과 일궈내신 성취들은, 그 후 30년 사이에 어떻게 된 것인가? 세계 곳곳에서 몇백년 전 노예무역을 한 인물들의 동상들도 철거되는 마당에, 피해자도 버젓이 살아 있는 80년도 안 된 우리의 식민지 문제를 이런 식으로 다룬다니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반면에 망한 지 30년 된 공산주의가 새로운 적인 것처럼 언급되는 것도 어리둥절할 뿐이다.

우리는 너무 당혹스럽지만, 이런 시대는 역사학자에게 너무 매력적이다. 아마도 먼 훗날 이 30년에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달라붙을 것이다. 결과를 아는 후손에 의해 예리하게 난도질당할 것을 생각하니 머리털이 쭈뼛 선다. 어떻게 분투해야 후손에게 욕 얻어먹지 않을까. 대충 살아도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시대도 있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젠장.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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