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우리는 지금 무법천지에 살고 있는가
요즘처럼 일상이 무서웠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비상식적 사고로 떼죽음을 당하고, 참사가 예상되는 자연재난 예고에도 설마하며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기에 출근하던 시민이 물에 빠져 숨졌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수백명 아이는 소리소문 없이 죽거나 죽임을 당했고, 사기꾼의 덫에 걸린 세입자는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 보증금을 떼여 죽음으로 내몰렸다. ‘내새끼 제일주의’에 편승한 교권침해는 교사의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졌고, 출·퇴근길에 벌어진 묻지마 흉기난동과 성폭행 살인은 ‘치안강국’ 한국의 위상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24일은 이태원 참사 300일 째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지난해 10월 서울 도심에서 150명이 넘게 죽었지만 사고 발생 10개월이 다 되도록 제대로 책임지고 사과하는 사람이 없다. 유가족은 왜 내 가족이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1년 가까이 길 위를 헤매고 다니지만 아직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지난 22일 중구 서울광장에서는 이태원 참사 발생 300일을 앞두고 유가족과 종교인들이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및 300일 추모 4대 종교 삼보일배’를 하며 관련자 처벌을 촉구했다. 이들은 지난 6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후 지금까지 법안 심의가 시작되지 않은 상황을 규탄하며 국회가 특별법 제정에 박차를 가해달라고 오열했다.
지난달 중순에는 극한호우로 오송참사가 벌어졌다. 사고 당시 지하차도 CCTV를 보면 범람한 미호강 흙탕물이 폭포수처럼 지하차도 입구를 덮치면서 터널에 갇힌 차량 속 피해자 14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기록적인 폭우로 홍수경보가 발령됐지만 재난 대응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여느 참사처럼 언제 책임자를 찾아내 처벌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수천만 원~억 대의 전세 보증금을 떼인 젊은층의 죽음도 잇따른다. 지난 봄 숨진 채 발견된 5명의 전세사기 피해자 대부분은 20, 30대 사회초년생으로 저축과 대출 등으로 마련한 목돈을 일순간에 잃으면서 더는 살기 힘든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23일 부산지법 동부지원에서 열린 공판에 사기 혐의로 나온 50대 최모 씨를 보면, 무자본·갭투자 방식으로 부산 연제구 중구 수영구 부산진구 등 6개 구 총 263채를 사들여 263명에게 200억 원이 넘는 보증금을 떼 먹었다. 돈 한 푼 없이 수백억 대 사기를 칠 수 있게 방치한 대가가 20, 30대를 벼랑 끝으로 밀어넣었다.
2015~2022년 태어난, 출생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미등록 영유아 2123명 중 249명이 이미 숨졌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알게 됐다. 미등록 아동 10명 중 1명 이상이 숨졌으니, 전수조사를 하지 않은 다른 연도에 태어난 아동 중 또 얼마나 많은 이가 세상을 떠났을지 모른다. 그간 미등록 아동이 이렇게나 많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어린 생명을 유기·학대하는 우리사회 민낯이 드러났다.
서울 서이초 새내기 교사의 극단적 선택 후 터져나오는 교권침해 행태에 대해서는 말을 잃게 한다. 학생의 욕설·폭행과 함께 학부모의 모욕·명예훼손·협박·폭행 등등. 교육부에 따르면 교육활동 침해를 심의하는 교권보호 위원회 심의 건수는 2019년 2662건에서 지난해 3035건으로 늘었다. 공교육 붕괴로 학교와 가정의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양측의 감정이 곪아 터지는 동안 정부는 어디서 무엇을 했나.
이 같은 무법천지는 흉기난동 사건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서울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에 이어 경기 성남시 분당 서현역 사건, 서울 신림동 성폭행 살인 사건까지 잇따라 터지는 흉악범죄에 마음 편히 일상을 누리기가 어렵다. 각종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법보다 ‘전 정부 탓, 현 정부 탓’ 공방만 치열한 정부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눈떠보니 선진국’이란 책이 발간되면서 한동안 전국민을 으쓱하게 만든 적이 있다. 불과 2년이 지난 지금은, 자고나니 무법천지 세상에 내던져진 느낌이다.
임은정 메가시티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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