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발길질, 죽으면 암매장…60년 전 ‘악몽’ 베일 벗는다
- 1951년 설립된 ‘국가폭력 공간’
- 피해자들 아픈 기억으로만 남아
- 생존자 모임 손석주 대표 결심에
- 하나 둘 뜻 모아 진상규명 첫발
- 입소 입증할 기록카드 못 찾고
- 원장 일가 자료도 일부만 남아
- 어려운 상황에도 명예회복 확신
- “인간 이하 삶 산 이들 한 풀 것”
부산 영화숙·재생원은 정부와 부산시 등 국가기관이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거리에서 ‘정화’하겠다는 명목으로 저지른 국가폭력의 공간이었다. 관과 결탁해 민간이 마구잡이로 수용인을 늘려 보조금을 타내는 ‘부랑인 비즈니스’의 현장이기도 했다. 수용인의 삶은 폭력과 강제노역, 학대와 빈곤으로 점철돼야 했다. 이제는 집단수용시설 인권유린의 기원으로 평가받지만, 불과 지난해까지 피해자 개인들의 ‘아픈 기억’으로만 오랜 세월 머물렀다.
진상규명 움직임이 생겨난 뒤엔 어려 의문이 따라붙었다. 50년 이상 지난 세월, 흔적도 찾기 힘든 당시 기록 등의 사정으로 ‘이제와서 진상규명이 가능하겠느냐’는 회의가 주변을 맴돌았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국가기관의 직권조사 대상, 즉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힘써야 할 일이 된 배경에는 “분명히 있었던 일을, 있었던 일로 인정받고 싶다”는 피해생존자들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다.
▮집단수용시설 ‘영화숙·재생원’
영화숙은 1951년 3월 서구 동대신동에서 처음 출범했다. 재단법인 설립 인가는 1953년 3월로, 당시는 아동 약 50명을 수용하는 작은 시설이었다. 1961년 이순영 원장이 취임하면서 일가가 법인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엔 사하구(당시 서구) 장림동으로 시설을 옮기면서 수용 규모를 늘렸다. 1962년 부산시가 성인 부랑인을 수용하기 위해 영화숙 근처에 조성한 ‘재생원’의 수용 업무를 위탁받았다. 1968년 1월 ‘부산시재생원설치조례’가 제정되면서 명확한 지원 근거까지 확보, 시와의 공식 위탁 계약도 체결됐다. 이로써 재단은 영화숙에 부랑아 400여 명, 재생원에 부랑인 800여 명을 수용하는 지역 최대 집단수용시설의 운영자로 성장했다.
두 시설은 시 보조금과 민간 구호단체의 지원금으로 운영됐다. 고아 1인당 쌀보리 2홉 반과 부식비 10원, 걸인·행려자 한 명당 수용비 58원을 받았다. 이 원장은 구호물품은 국제시장 등에 되팔았고, 보조금 또한 대지 2만여 평과 임야 6500여 평을 사는 데 쓰였다. 1970년 이 원장은 12년간 국고보조금과 구호단체 물품을 횡령한 혐의로 시 공무원 4명과 함께 구속됐다가 구속적부심에서 석방되기도 했다.
붙잡혀 온 아동에게 가해진 학대는 심각했다. 아침마다 제식훈련을 받았고, 동작이 틀리면 발길질을 당했다. 끼니는 꽁보리밥이나 강냉이죽이 전부였던 터라, “풀이란 풀은 다 뜯어먹었다”(진순애 씨)거나 “쥐를 고기 삼아 먹거나 시설 내 농장의 소·돼지에게 주는 여물을 훔쳐 먹는”(유옥수 씨) 지경이었다. 맞아 죽거나 병들어 목숨을 잃는 아이들은 “소나무를 뽑아 생긴 구덩이에 파묻었다”(장병문 씨)고 한다.
재단은 미국인 소 알로이시오 신부에 의해 아동 학대 사실을 폭로당했다. 소 신부는 1969년부터 영화숙·재생원의 비위와 아동학대 사실을 수집해 시와 중앙정부에 보냈다. 영화숙의 인권유린을 규탄하는 서명운동도 진행했다. 결국 시는 영화숙·재생원 수용자 600여 명을 소년의집·칠성원·형제육아원 등 다른 시설로 옮기는 한편 재생원 위탁 계약을 해지했다. 이후 보건사회부는 1976년 1월 재단의 설립 인가를 취소했다.
▮오랜 세월에도 ‘꺾이지 않는 마음’
영화숙·재생원에서의 비참한 삶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반면 영화숙·재생원의 후신인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국가와 부산시의 사과를 받았다. 경기지역의 대표적 인권침해 사례인 선감학원 사건 또한 진상조사 등이 진행돼왔다. 부산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 협의회 손석주(60) 대표가 자신이 겪은 인간이하의 삶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경남 양산에서 배달부로 일하는 그는 자신의 생계 시간을 줄여가면서까지 두 시설에서의 일을 알리는 데 주력해왔다. 지난해 10월 국제신문과 만난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온 아픔을 마침내 털어놓은 뒤 “형제복지원 등이 전부가 아니다. 분명히 있었던 일을, 있었던 일로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손 대표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공유되면서 피해생존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같은 아픔을 겪은 형(유 씨)으로서 동생(손 씨)에게 밥 한 끼 사주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에서 열린 저녁 자리는 머잖아 진상규명을 위해 앞장서는 협의회로 확대됐다. 지난해 12월 21일 처음 발족한 협의회는 이듬해 1월 3일 부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앞으로 이뤄질 조사도 쉽지만은 않다. 영화숙·재생원 입소 사실을 직접적으로 증명해 줄 아동기록카드 등은 현재도 발견되지 않았다. 소년의집 등 타 시설로 전원될 때 해당 시설이 작성한 간접 기록만이 확보됐다. 원장 일가에 대한 기록, 시설 운영 상황에 대한 자료 또한 시 기록관이나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등에 파편적으로 남아 있다. 피해생존자의 입소 사실 입증과 별개로, 당시 피해가 발생한 제도적 요인을 확인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마침내는 진실에 빛이 드리울 거라고 피해생존자들은 확신한다. 손 대표는 “부산시와 당시 서구가 주고 받은 공문에서 영화숙에 입소 중이던 아동의 명단이 발견(국제신문 지난해 12월 5일 자 1면 등 보도)됐듯, 참혹했던 당시의 기록이 분명 있을 거라 믿는다. 이번 직권조사를 통해 단지 옷이 남루하다거나, 꼴이 못 났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가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의 한이 풀릴 것이다”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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