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럭셔리 '델보'가 선택한 백화점 전시 통했다

송주희 기자 2023. 8. 2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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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년 전통 벨기에 명품 가죽 브랜드
마그리트 협업 컬렉션 한국 론칭 기념
작품 전시 동반 팝업 신세계 강남점서
400억 규모 그림 걸었다 안전상 대체
갤러리 대신 '친밀·경험' 백화점 선택
하루 3000명 이상 방문, 호평 이어져
"가치 공유" 브랜드·백화점·고객 만족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1층에서 진행 중인 델보 팝업스토어를 방문한 고객들이 진열된 제품과 전시 오브제를 둘러보고 있다./사진 제공=신세계백화점
[서울경제]

“파이프 그림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 놓았으니 처음 이걸 본 사람들이 얼마나 의문을 품었겠어요.”

성인 7~8명이 들어갈 법한 어두운 부스 안. 한쪽 벽에 작은 액자 5개가 걸렸다. 순서대로 액자 속 그림에 대한 해설이 이어지는 가운데 누군가는 휴대폰에 설명을 적고, 또 어떤 이는 고객를 끄덕이거나 작은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갤러리의 전시회 도슨트 현장 같은 이곳은 신세계(004170)백화점 강남점 1층에 차려진 벨기에 명품 가죽 브랜드 ‘델보(Delvaux)’의 팝업 스토어다.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탄생 125주년을 맞아 그의 대표 작품들로 디자인된 델보의 ‘마그리트 캡슐 컬렉션’을 국내 최초로 선보이기 위해 오는 27일까지 열리는 행사다. 당초 컬렉션과 함께 르네 마그리트 재단이 소장한 400억 원 규모의 작품 7점을 함께 소개하려 했으나 매장 내부의 온도·습도 등 전시 환경 안정화 문제로 걸었던 원작을 내리고 대신 ‘이미지의 배반(1952)’, ‘조르제트의 초상(1936)’, ‘레슬러의 무덤(1960)’, ‘크리스털 욕조’(1946), ‘바우키스의 풍경(연도미상)’ 등 5개 작품의 인쇄 이미지를 붙였다. 부스 밖에도 마그리트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구름, 사과, 장미 등 오브제를 대형 조형물로 만들어 세웠고, 한쪽 벽면에는 그의 작품을 디지털로 재현해 설명하는 코너를 만들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1층에서 오는 27일까지 ‘사랑의 이름으로’라는 주제로 열리는 델보 팝업스토어의 르네 마그리트 전시 부스에 르네 마그리트 작품 이미지들이 걸려 있다. ‘이미지의 배반(1952·왼쪽부터)’, ‘조르제트의 초상(1936)’, ‘레슬러의 무덤(1960)’, ‘크리스털 욕조’(1946), ‘바우키스의 풍경(연도미상)’ /사진 제공=신세계백화점

지난 22일 찾은 현장에서는 로비를 오가던 사람들이 부담 없이 가방과 오브제를 구경하거나 전시 내용을 촬영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평소 다가가기 어려웠던 고가 명품도, 마냥 어렵게 느꼈던 초현실주의 미술도 ‘갤러리의 전시’가 아닌 ‘백화점의 팝업’으로 마주하자 신선한 경험과 만남이 됐다. 신세계와 델보가 팝업을 기획하며 의도한 바도 바로 이것이다. 김정은 델보코리아 지사장은 “델보 브랜드 자체가 판매를 늘리기 위한 단발성 마케팅은 하지 않는다”며 “브랜드가 진행해 온 문화 콘텐츠의 계승 노력과 그 진정성을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팝업의 취지를 설명했다.

김정은(오른쪽) 델보코리아 지사장이 22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델보 팝업 매장에서 한국 독점 판매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델보는 마그리트의 ‘대화의 기술(1950)' 속 물결 형태로 들어간 ‘Amour’라는 단어를 대표 상품 ‘브리앙 백’과 ‘핀 백’에 자수로 넣어 선보였는데, 하늘색 자수는 아시아 독점, 검정 자수는 한국 독점으로 판매한다./사진 제공=신세계백화점

실제로 이런 행사가 아니고선 평소 델보 매장은 마음 편하게 들어가기엔 부담스러운 곳이다. 1892년 생긴 델보는 에르메스(1837), 루이비통(1854)보다도 역사가 깊다. 화려한 로고 대신 최고 품질의 가죽과 고유의 ‘D’ 모양의 버클, 단정한 디자인의 가방으로 유명 인사들의 선택을 많이 받아 왔으며 티 내지 않는 일명 ‘조용한 럭셔리’가 부상한 최근 더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마그리트 재단과의 협업도 2008년 시작했는데, 인기 작가를 중심으로 단발 이벤트에 그치는 게 대부분인 업계의 아트 컬래버와 달리 수년간 의미있는 동행을 이어지고 있다. 김 지사장은 “(비록 불발됐지만) 400억 규모의 작품을 왜 갤러리 아닌 백화점에 전시하느냐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며 “애초 목적이 판매나 특정 수요층을 위한 게 아닌, 넓은 범위의 고객과 만나 브랜드의 가치를 공유하는 데 있었다”고 그 이유를 말했다. 그의 말처럼 신세계 강남점은 명품으로도 유명하지만, 유동 인구가 많아 고객 유입 효과가 큰 곳이다. 여기에 2020년 점포 내에 아트 스페이스를 만들어 업계 최초로 회화, 오브제, 사진, 조각 등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등 문화예술 콘텐츠 운영에서의 차별화된 역량도 보유하고 있다. 김 지사장은 “하루 평균 팝업 방문객이 3000명 이상”이라며 “틈틈이 전시 부스에서 작품 설명을 하는데, 가족 단위로 온 어린이 방문객들의 호응이 좋다”고 웃어 보였다. 이런 ‘긍정적인 브랜드 경험’이 쌓여서 ‘티 내지 않아도 알아보는 명품’을 가능케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1층에서 진행 중인 델보 팝업스토어를 방문한 고객이 디지털로 재현한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다./사진 제공=신세계백화점

신세계백화점의 내부 평가도 긍정적이다. 미술을 중심으로 문화 예술 사업에 힘을 쏟는 중인 만큼 이번 행사가 강남점은 물론, 백화점의 사업 비전을 강조하는 신선한 시도였다는 것이다.임훈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장(부사장)은 “이번 팝업 스토어는 문화 예술을 즐기는 고객들에게 특별한 쇼핑 경험이 될 것”이라며 “지속적인 공간 혁신으로 대한민국 랜드마크 백화점의 위상을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송주희 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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