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훈련 맞아요?” 6년 만의 공습 대비 민방위훈련, 하는 둥 마는 둥

홍다영 기자 2023. 8. 2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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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 소리 빗소리에 묻혀

“민방위 훈련을 하는지도 몰랐어요. 공무원 같은 분들이 무작정 지하로 들어가라고 외치기만 하던데요? 글쎄, 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매뉴얼이 제대로 있는지… 이런 식으로 훈련하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서울 종로구 광화문역에서 23일 오후 2시 10분쯤 만난 권모(46)씨가 한 말이다. 이날 오후 2시 전국에서 일제히 ‘윙’ 소리와 함께 사이렌이 울리며 6년 만에 공습 대비 민방위 훈련(민방공 훈련)이 실시됐다. 그런데 10분 만에 시민들이 훈련이 부실하다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권씨는 시민들이 더 적극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공습 대비 민방위 훈련(민방공훈련) 6년 만에 실시된 23일 오후 서울 중구 시청역에서 시민들이 대피 훈련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하로 대피하라”는데…버스정류장에서 15분간 오지 않는 버스 기다려

민방위 훈련은 이날 오후 2시 정각 ‘공습 경보 발령’이라는 문자메시지가 일제히 발송되면서 시작됐다. 그 시각 서울 시내에는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고, 1분 간 울린 사이렌 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광화문에서는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형광색 우비를 입고 군데군데 서서 호루라기를 불며 시민들을 통제했다. ‘교통 통제, 민방위 훈련’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진 표지판도 들고 있었다. 통제관들은 우산을 쓴 채 비상 시 국민 행동 요령이 적힌 팸플릿을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노약자, 어린이, 임산부, 장애인 등 취약자를 도와 함께 안전하고 신속하게 대피하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지하철역이나 터널, 건물 지하 등 대피소가 팸플릿에 그려져 있었다.

통제관들은 한 명 한 명 시민들에게 대피하라고 했고 광화문역 계단 밑으로 몇 명이 들어갔다. 민방위 훈련 중에도 지하철은 정상 운행하지만, 하차한 승객들은 오후 2시 15분까지 역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미국 보스턴에서 온 시모네(19)씨는 “사이렌 소리를 듣고 사람들을 따라 차례차례 지하철역으로 갔다”고 했다.

6년 만의 공습 대비 민방위 훈련을 겪는 시민들 상당수는 사이렌이 울려도 멀뚱멀뚱한 표정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등 갈 길을 갔다. 주민들은 오후 2시 정각에 훈련 공습 경보가 발령되면 즉시 가까운 민방위 대피소나 안전한 지하 공간으로 대피해야 한다.

공습 대비 민방위 훈련이 실시된린 23일 오후 2시쯤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시민들이 훈련 공습경보가 울린 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홍다영 기자

그런데 지하는커녕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도 모르는 듯했다. 광화문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는 차량 이동이 통제돼 15분 간은 올 일이 없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만 10여 명이었다. 송모(40)씨는 “정류장에 사람들이 많은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인근 카페를 향해 걸어가던 김모(42)씨는 통제관의 제지에 건물 1층으로 들어갔다. 김씨는 “훈련 중인 것은 알지만 민방위가 안전에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민방위 대피소인 광화문역에 옹기종기 서 있던 시민들은 오후 2시 15분 ‘경계 경보 발령. 현 시간부로 차량 통제가 해제되고 국민 여러분께서 이동이 가능함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안내 문자가 오자 광화문역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5분 뒤 2시 20분 안내 방송이 시작되고 문자가 오며 경보가 해제됐다.

미국에서 온 그레이브(41)씨는 “처음에 사이렌 소리를 듣고 놀랐다”며 “(통제관의) 안내로 지하에 안전하게 대피했다”고 했다. 역시 미국에서 온 멕캘리(24)씨는 “세종문화회관 안에 있었는데 사이렌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며 “휴대전화 문자가 와서 민방위 훈련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한 외국인 남성은 “잠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공습 대비 민방위훈련이 실시된 23일 오후 2시 5분쯤,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통제에 따르지 않고 지하로 대피하지 않은 시민들이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홍다영 기자

◇학생들은 학교 저층이나 강당으로 대피, 전국 216개 구간 차량 통제

민방위 훈련은 국가 재난이나 비상 사태 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실시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연간 10회 이상 이뤄졌으나 국민 불편 문제 등으로 차츰 횟수가 줄었다. 가장 최근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습 대비 민방위 훈련이 실시된 때는 2017년 8월이다. 이후 남북 관계와 코로나19 등을 이유로 6년간 실시되지 않았다. 올해 5월 관공서와 공공기관, 학교를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실시됐을 뿐이다.

전국 학교에서도 이날 민방위 훈련이 실시됐다. 학생들은 지하철역 대신 학교 내부 지하 강당이나 저층 복도로 대피했다. 대형마트와 영화관 등 전국 다중이용시설 480여 곳도 고객 대피를 유도하며 훈련에 협조했다. 서울의 일부 건물 엘리베이터에는 ‘민방공 훈련으로 승강기 운행을 임시 정지합니다’라는 문구도 붙어있었다.

오후 2시 공습 경보가 울리며 15분간 전국 216개 도로에서 통행이 제한됐다. 서울은 세종대로 사거리~서울역 사거리, 여의2교 사거리~광흥창역 사거리, 하계역 사거리~중화역 사거리 등 3곳이었다. 부산은 윤산터널 앞 사거리~범어사 어귀 삼거리 일대 등 6곳이었다. 도로 위를 달리던 차량은 갓길에 잠시 정차했다. 소방차 등 긴급 차량 실제 운행 훈련도 전국에서 진행됐다.

방독면 착용을 알려주는 화생방과 비상 식량 체험 훈련도 인천과 강원도, 경기도 접경 지역에서 이뤄졌다. 집중 호우 피해를 입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세종시와 충북 청주 등 57개 지역은 이번 훈련에서 제외됐다. 이번 민방위 훈련부터 공습 경보 발령 시 사이렌 울림 시간은 3분에서 1분으로 줄었다. 경계 경보 발령과 경보 해제는 사이렌 대신 음성 방송과 문자 등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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