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덕수궁에 가야 한다
광화문이 회사인데 생각해 보니 제대로 구경을 한번 못 해 봤다. 덕수궁 안을. 담 하나 넘는 게 뭐라고 20년이 넘도록 덕수궁 담장 밖만 빙빙 돌고 만 거였다. 그런 곳을 한여름 폭염에, 계획도 없이 우연히 가게 되었다. 고1딸과 함께. 여름방학에 한옥이나 궁에 가보고 싶다는 아이 말에 무작정 길을 나섰다.
일기예보를 보고 혹시 몰라 우산을 하나만 챙겼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우비를 살까 하다가 금세 그칠 것도 같아서 견뎌보자고 했다. 입장권은 성인 천 원. 그마저도 청소년은 무료입장. 들어서자마자 장대비로 돌변한다. 들이붓네, 부어.
허허, 그런데 오히려 좋다. 시원하다. 땡볕에 돌아다니면 그건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정신승리로 무장한 모녀는 우산 아래로 몸을 포개어 천천히 걸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나란히, 나란히 걷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산이 하나인 것은 때론 얼마나 낭만적인지. 모녀 사이에도 예외는 없더라.
하필 공사 중이라 문이 닫힌 덕수궁 안 국립현대미술관 앞. 계단을 올라 이오니아식 기둥 옆으로 잠시 비를 피해 본다. 비 내리는 소리도 듣고, 비 내리는 모습도 보고. 한 개의 우산이 두 개의 우산으로, 두 개의 우산이 세 개의 우산으로 갑자기 일곱, 여덟 개의 우산이 다시 두세 개의 우산으로 물결 지어 오는 사람들 구경하는 것이 꽤 재밌었다.
특히나 우비 입은 사람이나 노란 우산, 분홍 우산, 남색 우산 등등의 행렬들도 어찌나 귀엽던지. 평소 사람 구경하고 관찰하는 거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풍경에 마음을 뺏기고 있을 때 갑자기 히죽히죽 웃기 시작하는 딸.
"뭔데 그렇게 혼자 숨 죽여 웃냐?크게 웃어."
"아니 내가 친구에게 여기 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친구가, 너 유럽 갔어? 이러잖아. 아니 덕수궁 석조전을 왜 몰라."
"모를 수도 있지. 너야 이런 데 관심이 있으니까 알 수 있는 거고."
"아니 그래도 교과서에 봤을 텐데..."
교과서에 있다고 다 기억하나? 감동이 없으면 기억에 남지 않는 거지. 그러나 오늘 같은 날 석조전을 봤다면 절대 잊지 못하리라.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감동이니까. 미리 예약을 못해서 석조전 내부 구경과 대한제국역사관 설명은 못 들었지만 충분하다. 비와 석조전, 배롱꽃이 어찌나 찰떡으로 어울리던지. 한국의 미란 이런 것인가 싶고, 여기서는 비를 쫄딱 맞아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몸은 놀고 있지만 마음은 뭔가 다음 학기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 고1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흘려대지만 뭔 말인지 나는 잘 모르겠고.
그 와중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나 어릴 적에 엄정화가 출연했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3)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걸 로 바꾸어 부르고 싶을 정도로 이곳이 좋다는 거?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푸른 정원과 고전적인 건축물, 꽃 그리고 비의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있다니.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덕수궁 연못 근처에는 잠시 비를 피할 수 있는 가배집(커피숍)도 있으니 커피 한 잔을 곁들이면 금상첨화일 터.
짧은 시간 많은 양의 비를 뿌리는 집중 호우로 도시가 흠뻑 젖을 때 가던 방향을 잠시 틀어 덕수궁에 들러 보는 것은 어떨까. 담 하나만 넘으면 시대를 뛰어 넘어 고즈넉한 세상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에 서기까지 너무 멀리 돌아온 느낌이다. 다른 이들은 나보다 조금 빨랐으면 좋겠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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