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서 쓰고 스쿠버다이빙하다 사고로 장애인 된 여행객…법원 “여행사 책임 有”

홍인석 기자 2023. 8. 2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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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세부 ‘패키지여행’…스쿠버다이빙 후 사지 마비
법원, 수상활동 앞서 ‘동의서’ 작성해도 업체 과실 인정
여행객 건강 상태 등 손해배상금 산정 시 고려 요소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모습./뉴스1

단체 관광으로 떠난 해외여행에서 여행객이 스쿠버다이빙 체험 중 사고로 장애 판정을 받았을 경우, 여행사가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여행사는 스쿠버다이빙에 앞서 여행객들에게 ‘사고가 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동의서를 받았지만, 법원은 이를 불공정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법원은 이와 유사한 사안에 대해서도 위험을 사전에 인지했다는 내용의 여행객 동의서나 안전 고지 유무만으로 여행사가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재판장 최규연 부장판사)는 최근 A씨가 B여행사를 상대로 제기한 16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B여행사는 법원 판단에 따라 A씨에 약 7억7300만원, 원고승계참가인 국민연금공단에도 약 15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

서울중앙지법./뉴스1

◇세부로 떠난 가족 여행…스쿠버다이빙 체험 후 장애판정

A씨는 2018년 8월 B여행사와 3박 5일 필리핀 세부 여행 계약을 체결했다. 여행 일정에는 스쿠버다이빙 체험도 포함돼 있었다. A씨는 세부 현지 가이드와 함께 여행하면서 스쿠버다이빙 강습 일정에 따라 수영장에서 수중 압력변화에 몸을 적응시키기 위한 훈련과 수신호 교육 등을 받은 뒤 세부 바다에서 스쿠버다이빙 체험을 진행했다.

B여행사는 스쿠버다이빙에 앞서 ‘책임면제와 위험 가정 동의서’ 서명을 요구했다. 동의서는 체험 스쿠버다이빙은 심각한 장애와 사망을 초래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이 있으며, 강사나 (강사의) 소속 회사, 여행사 등은 부상이나 사망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없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A씨는 동의서 아랫부분에 이름과 사인을 기재했고 ‘건강내역’란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이후 A씨는 체험 강사의 도움을 받아 스쿠버다이빙을 하다가 호흡곤란, 경련, 경직 등의 증상을 보이며 의식을 잃었다. 세부의 한 대형병원으로 이송된 A씨는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한국으로 이송된 후 급성 호흡부전, 경련성 발작 진단을 받았고, 재활치료를 받던 중 2019년 ‘뇌 병변 2급’ 장애등급 결정을 받았다. 국민연금공단은 장애연금으로 A씨에게 약 3000만원을 지급했다.

◇A씨 측 “여행사, 응급조치 미흡”…법원 “여행사, 손해배상 책임 있다”

A씨 측은 여행사 직원들의 과실로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B여행사 직원들은 잠수 후 수면으로 상승하는 속도를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했고, 의식을 잃은 A씨에게 충분한 응급조치를 하지 않아 A씨가 뇌 손상으로 인한 사지 마비 등 상해를 입었다고 강조했다. 사고 발생 후 바지선이 오는 약 5분 동안 직원들은 A씨에게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A씨에게 장애연금을 지급한 국민연금공단은 승계참가인 자격으로 B여행사에 장애연금 비용을 배상하라고 주장했다. 국민연금법 제114조는 ‘제3자 행위로 장애연금이나 유족연금의 지급 사유가 발생해 연금을 지급한 때는 그 급여액의 범위에서 제3자에 대한 수급권자의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해 수급권자를 대위(제3자가 다른 사람의 법률적 지위를 대신해 그가 가진 권리를 얻거나 행사하는 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B여행사 과실로 A씨가 장애 판정을 받았고 공단이 장애연금을 지급한 만큼, 해당 금액을 B여행사에 청구한 것이다.

법원은 여행사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여행사는 사고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동의서’를 작성했기에 면책된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동의서에 서명한 사실만으로 여행객이 모든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하거나 (여행사의 잘못이) 면책된다는 약정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생명·신체 안전 확보와 관련한 위험을 여행객에게 떠넘기거나 손해배상책임을 포괄해 제한하는 것으로 불공정하기 때문에 무효”라고 덧붙였다.

이어 “여행사는 스쿠버다이빙으로 인한 위험을 예방하고 손해가 발생할 경우 확대되지 않도록 합리적 조치를 할 의무가 있다”며 스쿠버다이빙 당시와 사고 이후 응급조치와 관련한 안전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인천광역시 중구 을왕리해수욕장을 찾은 피서객들이 수상레저 체험을 하고 있다./뉴스1

◇여행 중 작성하는 ‘면책 동의서’…업체 과실 ‘면책’ 근거 아냐

법원은 여행 과정에서 여행사 등 업체 측이 ‘면책 동의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업체 과실로 인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책임을 묻고 있다. 사고가 나더라도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부제소합의’도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 대법원은 여행사가 사고 발생을 예견했거나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사고 위험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를 다 하지 못했다고 판단되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동의서에 서명했더라도 업체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 셈이다.

서울중앙지법은 2014년 쾌속선을 타다 상처를 입은 C씨의 손해배상 청구를 일부 인용했다. D여행사는 “배에 탈 때 가급적 뒷좌석에 앉고, 어길 경우 사고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는 내용이 기재된 ‘안전고지 유무 확인서’에 여행객의 서명을 받았지만 손해배상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재판부는 “여행객들은 탑승 직전에야 확인서에 서명한 것으로 보이며, 여행사가 탑승객들에게 쾌속선 탑승의 위험성에 대해 알리고 충분한 안전조치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다만 쾌속선을 탄 17명 중 C씨만 상처를 입었고 C씨가 탑승 중 불편을 호소하지 않았다며 D여행사 책임을 50%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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