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보훈대상자 인정해야” “이 XX야!” 등 유급 언급하며 강하게 질책 “누가 봐도 많이 떤다 싶을 정도로 몸 떨어” 法 “강한 질책으로 목숨 끊었다고 봐야… 국가, 의무복무자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져야”
군인이 상관에게 모진 질책을 듣고 이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면 보훈보상대상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 17일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재판장 김대웅)는 해병대 훈련병 A군 유족이 경기북부보훈지청장을 상대로 낸 보훈보상대상자 요건 비해당 결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결정을 한 원심을 깨고 보훈보상대상자 비해당 결정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사건 당시 만 19세이던 A군은 2020년 5월 18일 해병대에 입대했으며 입대 17일 만인 2020년 6월 3일 오후 9시10분쯤 생활관 화장실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채 발견됐다.
사건은 6월 3일 오후 6시37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군이 소속된 소대는 당일 저녁 훈련이 예정돼 있었다. 저녁 배식 및 청소를 하느라 다소 늦게 생활관에 복귀한 해당 소대는 생활관에서 전투복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이때 소대 부소대장이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가라”고 지시했고, A군은 부소대장 등을 향해 손가락 욕설을 했다. 부소대장은 이를 보지 못했지만 지나가던 다른 소대 B 중사가 이를 봤다.
B 중사는 A군에게 “누구에게 손가락 욕설을 한 것이냐”고 다그쳤고 A군은 다른 훈련병과 장난을 친 것이라 답했다. 그러자 B 중사는 A군과 지목된 훈련병을 생활관 복도 끝 현관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 자리에서 B 중사는 이들을 재차 다그쳤다. 당시 소대에 있었던 다른 훈련병들 진술에 따르면, B 중사는 짜증을 내며 화를 내는 듯한 말투로 이들을 훈계했다. 한 훈련병은 B 중사가 A군에게 삿대질을 하며 “앞을 보라고!”라고 소리치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A군과 함께 질책을 받은 훈련병은 1심 법정에서 A군이 질책을 받을 당시 온몸을 떨고 있었다면서 “누가 봐도 너무 많이 떤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이 떨었다”고 증언했다. B 중사가 당시 “이 XX야!”라는 욕설을 한 것으로도 기억한다고 수사기관에 밝혔다.
A군은 이 같은 질책을 받은 지 약 2시간 30분 만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소방관이 꿈이었던 A군은 해병대 복무를 기대해왔다고 한다. 정신적, 체력적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A군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까지 상관이나 동기들과도 갈등 없이 잘 어울렸던 것으로 파악됐다.
A군은 B 중사로부터 ‘방금 한 행동으로 퇴소 내지 유급이 될 수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듣고 상당한 압박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기대했던 군 생활이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한 두려움과 함께 깊은 절망감에 빠진 것이다. A군 심리를 분석했던 심리상담센터 전문가는 “유급 과실로 인해 해병대원으로서 품은 자부심이 무너지고 이후 군 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감 등의 심리적 문제가 자살 촉발 요인으로 평가된다”고 분석했다.
해군본부는 2020년 10월 7일 A군에 대해 순직을 인정했다. B 중사 훈계가 A군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한 촉발 요인으로 작용했다 판단한 것이다.
A군 유족은 이를 토대로 보훈보상대상자 신청을 했지만 경기북부보훈지청은 이를 거부했고, A군 유족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지만 항소심은 A군이 보훈보상대상자로 선정될 이유가 충분하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는 “A군의 행동이 상급자 모욕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B 중사는) 퇴소 내지 유급까지 언급하는 등 A군을 강하게 질책했다”며 “만 19세의 어린 나이로 17일차 훈련병에 불과한 A군으로서는 깊은 절망감에 빠졌던 것으로 보이고 A군의 자살은 질책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판시했다.
이어 재판부는 “A군과 같이 이제 막 성인이 된 사람이 갑작스럽게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부모, 친지, 친구들과 떨어져 낯선 사람들과 생활하며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엄격한 규율과 함께 강한 군사훈련을 받게 될 경우 작은 사건에도 정신적으로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보훈보상대상자 인정요건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법이 개정된 점에도 주목했다. 재판부는 “보훈보상자법은 의무복무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수차례 개정됐다”며 “이 같은 개정취지는 이 사건 상당 인과관계 판단에 있어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항소심 때부터 이 사건을 대리한 행정소송 전문가 강호석 변호사(법무법인 정향)는 “항소심은 의무복무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시했고, 보훈보상자법에서 인과관계 인정요건을 완화하여 개정한 입법취지를 설시했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한 1심을 파기하고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