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샷] 환자에게 촉감을 되돌려준 신경과학자, 별이 되다
로봇 손의 압력 변화를 뇌로 전달, 촉감 구현
여성 암환자 재활 위한 바이오닉 유방도 개발
촉감(觸感)은 세상으로 열린 창(窓)이다. 손에 닿은 사물이 무엇인지,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려주고, 사람의 감정도 전달한다. 사고나 질병으로 세상과 단절됐던 환자들에게 다시 촉감이라는 창을 열어줬던 과학자가 세상을 떠났다. 미국 시카고대는 신경과학자인 슬리먼 벤스메이아(Sliman Bensmaia) 유기생물학 및 해부학과 교수가 지난 11일 4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마비 환자가 로봇 팔로 촉감 회복
벤스메이아 교수는 생전 촉각 신경과학 분야를 이끈 과학자였다. 그는 2013년과 2015년 국제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잇달아 동물실험을 통해 뇌에 전기 자극을 줘 손가락의 촉감을 구현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밝혔다. 당시 연구는 사고로 손을 잃은 환자가 로봇 손가락으로 예전과 같은 촉감을 회복할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학자들은 이미 생각대로 움직이는 로봇 팔과 다리를 개발했다. 뇌가 잃어버린 팔을 움직이려고 할 때 나오는 전기신호를 로봇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로봇 팔이라도 촉감까지 되살릴 수는 없었다. 뇌가 보낸 신호를 로봇 팔로 전달할 수는 있지만, 거꾸로 로봇 팔의 촉감을 뇌로 보내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벤스메이아 교수는 원숭이 실험에서 이 같은 한계를 극복했다.
원숭이는 왼손의 집게손가락과 새끼손가락에 전기 자극이 오면 오른손을 쳐다보도록 훈련받았다. 연구진은 원숭이 뇌에서 촉감을 처리하는 부위에 미세 전극 100개를 심고 이때 신경세포의 반응을 파악했다. 나중에 연구진이 전기 자극으로 똑같은 신경세포의 반응을 유도하자 원숭이는 손가락에 아무런 자극이 없었는데도 오른손을 쳐다봤다. 촉감을 구현한 것이다.
마침내 2016년 사고로 팔다리가 마비된 환자가 로봇 의수(義手)를 통해 손가락의 감각을 회복했다. 벤스메이아 교수는 피츠버그대의 로버트 곤트(Robert Gaunt) 교수와 함께 ‘사이언스 중개의학’에 “28세 마비 환자 네이선 코플랜드(Nathan Copeland)가 뇌에 이식한 전극을 통해 로봇 손의 촉감을 그대로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환자에게 로봇 손을 이식하고 촉감을 팔의 신경으로 전달한 적은 있지만, 마비 환자의 뇌에 직접 로봇 손의 촉감을 전달한 것은 처음이었다.
코플랜드는 12년 전 자동차 사고로 목과 척추를 심하게 다쳐 팔다리가 마비됐고 촉감도 잃었다. 그는 당시 “로봇 손이 물체에 닿자 내 손가락이 물체에 닿는 느낌을 받았다”며 “손가락의 어느 곳에 물체가 닿는지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눈을 가리고 한 실험에서 로봇 손의 어느 손가락이 물체에 닿았는지 84%의 정확도로 알아냈다.
연구진은 코플랜드의 뇌에서 몸에 닿는 감각을 관장하는 부위에 미세 전극 2개를 심었다. 침대 옆에 설치한 로봇의 손가락에는 압력 센서를 붙였다. 컴퓨터는 로봇 손가락이 물체에 닿을 때 발생하는 압력 변화를 전기신호로 바꿔 뇌에 전달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연구실을 방문해 코플랜드가 작동하는 로봇 의수와 주먹 인사를 하기도 했다.
◇유방 절제 환자의 삶의 질도 높여
벤스메이아 교수는 1973년 9월 17일 프랑스 니스에서 철학자인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와 알제리에서 자랐고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버지니아대에서 컴퓨터공학과 인지과학을 공부했지만, 마음은 피아노에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음악을 전공하려고 했지만, 부모의 의견을 따라 노스캐롤라이나대 심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2003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미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재활을 돕는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이때 단순히 팔다리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각까지 구현할 방법을 찾았다. 벤스메이아 교수는 2009년 시카고대 교수로 부임한 뒤에도 같은 주제에 매달렸다.
벤스메이아 교수가 촉감을 되찾아준 사람은 사고나 전투로 팔다리를 잃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2020년 국제 학술지 ‘첨단 신경 로봇공학’에 손발 절단 환자의 감각을 되살려준 로봇 기술을 유방 재건술에 적용해 ‘바이오닉 유방’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유방암 환자는 병세가 악화하면 가슴 한쪽 또는 양쪽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는다. 미국에서만 매년 10만명 정도가 유방 절제술을 받는데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암은 수술로 치료되지만, 여성으로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심하면 성기능 장애로까지 이어진다.
벤스메이아 교수는 시카고대 의대 부인과의 스테이시 린다우(Stacy Lindau) 교수와 함께 미 국립암연구소에서 연구비 38만달러를 받아 감각이 있는 바이오닉 유방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
유두 아래에 있는 압력 센서가 유방에 삽입한 보형물을 누르는 것을 감지하면 가슴 위쪽 전자회로로 신호를 보낸다. 전자회로는 이를 전기신호로 바꿔 갈비뼈 쪽에 있는 전극에 전송한다. 이 신호가 신경을 거쳐 뇌로 가면 가슴에 닿는 촉감을 실제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린다우 교수는 지난 16일(현지 시각) 시카고대가 배포한 부고 보도자료에서 “인간의 촉감 회복을 위한 벤스메이아 교수의 열정은 사랑에서 비롯됐다”며 “그는 촉감의 과학을 사랑했지만, 촉감의 본질과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함께 노력한 학생과 동료, 환자들을 더욱 사랑했다”고 말했다.
린다우 교수는 벤스메이아 교수의 바이오닉 유방이 암 치료에서 발생하는 성차별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전립선암에 걸린 남성 환자는 치료 과정에서 성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고려 대상이지만, 유방 절제나 이후 유방 재건 수술에서는 눈으로 보이는 심미적인 부분만 신경 쓰지 성기능은 거의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경의 교향곡을 사랑한 과학자
벤스메이아 교수는 평생 촉각을 연구한 과학자였지만, 피아노에 대한 열정도 잃지 않았다. 신경신호의 흐름을 ‘신경 교향곡’에 비유할 정도였다. 벤스메이아 교수는 시카고대 신경생물학자인 데이비드 프리드먼(David Freedman) 교수와 재즈 밴드를 결성해 2013년에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두 번째 앨범도 녹음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프리드먼 교수는 지난 22일 뉴욕타임스지 인터뷰에서 “대부분 과학자는 순수 또는 응용 한쪽에 연구를 집중하지만 벤스메이아 교수 연구진은 두 가지를 모두 수행했다”고 말했다. 인간의 감각을 구현하는 데 기초과학과 공학 연구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었다. 어쩌면 음악 역시 촉감이 주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참고 자료
University of Chicago(2023), https://news.uchicago.edu/story/sliman-bensmaia-leading-expert-neuroscience-touch-1973-2023
Frontiers in Neurorobotics(2020), DOI: https://doi.org/10.3389/fnbot.2020.00024
Science Robotics(2019), DOI: https://doi.org/10.1126/scirobotics.aax2352
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2016), DOI: https://doi.org/10.1126/scitranslmed.aaf8083
PNAS(2015), DOI: https://doi.org/10.1073/pnas.1509265112
PNAS(2013), DOI: https://doi.org/10.1073/pnas.122111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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