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아내가 “우리집에 유령이 있다”고 하니 T남편의 반응은? [인터뷰]
흔치 않은 공포물 연극…내달 2일까지
선명한 캐릭터…“반전 결말 흥미”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T(사고형) 남편(샘)과 F(감정형) 아내(제니)가 있다. 갓 태어난 아기와 평온한 일상을 꿈꾸는 40대 부부. 그날은 집들이였다. 새로 이사한 집에 오랜 친구 커플을 초대한 날이다. 오후 8시 40분, 저녁 식사 준비를 하며 근황을 나누는 즐거운 하루에 두려움이 불시착한다.
8시 54분, “우리집에 누군가 있어요. 혼령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제니는 고백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 T 남편은 어린아이 달래듯 말을 한다.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래. 있긴 누가 있어”. 더이상 물러날 데가 없다. 제니가 친구들에게 제안한다. “그럼 다 같이 2시 22분까지 기다려. 무슨 소리가 나는지 확인해보자고.”
붉은 숫자의 전자시계는 어두운 무대를 압도한다. 숫자가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째깍거리는 소리. 새벽 2시 22분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을 조이는 공포가 밀려온다. 연극 ‘2시 22분- 어 고스트 스토리(A GHOST STORY)’는 올 여름 공연계에 등장한 ‘사건’이라 할 만한 역작이다. 오컬트 소재를 가져온 미스터리 스릴러이면서, 예측불가한 대화의 향연. 우아한 쾌감과 심장 쫄깃한 자극이 요동친다.
최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배우 최영준은 “결말을 알고 연기하면서도 반전 자체가 너무 재밌으니, 이건 되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사건’으로 시작해 ‘사건’으로 향한다. 첫 번째 사건은 제니의 이야기와 함께 시작한다. 새 집으로 이사한 부부. 샘은 천문학 책을 쓰느라 외딴 섬을 유랑해 며칠 집을 비웠고, 그 사이 제니는 집안에서 수상한 소리를 듣는다. 원을 그리며 걷는 발소리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는 말소리. 연극은 ‘소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향한다.
배우들의 고민이 깊었다. 샘을 연기하는 최영준은 “미스터리 스릴러는 연극에서 잘 구현이 안된다. 그것이 연기와 만나 어떤 시너지가 생길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영화와 드라마처럼 카메라 각도와 무빙, 특수효과를 사용할 수 없는 이 연극은 ‘고정된 무대’로 최대치의 공포를 소환한다. 오로지 ‘소리’와 ‘분위기’로 매무새를 완성했다.
“사실 스릴러와 미스터리에선 배우들이 연기할 게 별로 없어요.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위기만 잡아주면 되니까요.” (최영준) 실제로 배우들은 억지스럽게 분장을 하거나,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인위적 연기를 하지 않는다.
샘과 제니를 각각 연기하는 최영준 박지연이 이 작품을 풀어가는 첫 단계는 ‘대화’였다. 두 사람의 성향 역시 갈렸다. 최영준은 ‘T’, 박지연은 ‘F’. 덕분에 캐릭터 분석도 수월했다. 최영준은 “샘은 보이는 그대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했고, 박지연은 “소통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부부의 관계는 묘하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제니는 샘을 만난 뒤 ‘샘이 종교가 됐다’. 박학다식하고 말도 잘해 보기에 따라 잘난 척이 심해 보이는 샘은 “엉망진창인 제니를 내가 완전히 바꿔놨다”고 믿는다.
“‘인식은 선택의 문제’라는 샘의 대사가 있어요. 그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하는 대사죠. 저의 좌우명에 가깝기도 해요. 전 서운함, 부러움, 시기, 질투가 거의 없어요. 서운한 감정도 그 사람이 서운함을 생각했기에 생기는 것이라고 봐요.”(최영준) 최영준의 MBTI는 ‘INTJ’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박지연은 가장 최신 ‘밈’인 “너 T야?”를 외치며 두 손으로 ‘T’를 그려보였다.
연극은 부부와 이들의 친구인 로렌과 벤이 풀어내는 대화가 쫀득하게 이어진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토론에서 시작해 젠트리피케이션까지 주제는 확장한다.
최영준은 “대본이 워낙 재밌다. 혼령에 대한 작가의 머릿속 낙서같은 말들이 굉장히 그럴 듯하다”며 “관객이 이 연극에 대해 추리하는 것을 잊게 만들게끔 끝까지 웃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연기했다”고 말했다. 박지연은 “연극에서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의견이 부딪힐 때 쫀쫀하고 재밌다”고 말했다.
“샘이 로렌의 남자친구인 벤에게 질 때 아주 통쾌해요. 그 때 전 벤에게 완전히 쥐고 흔들어라 할 정도로 져줘요. 자신이 무시한 사람에게 지고 나서 기껏 한다는 말이 아주 찌질해요. ‘로렌, 정말 남자 못 본다’는 대사죠.” (최영준) 연기로 자신이 맡은 인물의 양면성을 보여준 대목이었다.
무대는 ‘배우들의 놀이터’였고, 그 곳에서 배우들은 ‘물 만난 고기’였다. “마지막 3분 이전까지의 연기는 쉬워요. 그저 놀면 돼요.” (최영준) 한 사람만 빼고다. “제니는 힘들어요. 혼자만 장르가 달라요. (웃음)” (박지연) 혼령의 존재를 혼자만 감당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부부의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나 움직인다. 배우들의 평소 ‘연기 지론’이 무수한 연구과 연습을 통해 만난 결과다.
‘첫 리허설’ 때였다. 대본엔 ‘설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부부인 “샘과 제니는 사랑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 말에 ‘딴지’를 건 것은 최영준이었다.
“이건 어쩌면, 가스라이팅이라고 봐도 무관해요. 첫 리딩 때였어요. ‘두 사람은 사랑하고 있다’고 단정지어 나오는 설정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 설정을 느끼기 전에 믿어버리면 그곳이 종착지인 것처럼 가게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의무적 반박을 했죠. 그 사랑이 뭐냐고 물으며 의문을 가져보고자 했어요.” (최영준)
박지연은 당시를 떠올리며 “연습 과정에서 가장 인상깊은 순간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의심하고, 질문하며 두 사람은 각자의 인물을 무대 위에서 정밀하게 그려냈다.
“두 시간 밖에 되지 않는 공연에서 인물의 서사를 다 읊어줄 순 없어요. 그러니 배우들은 특수한 상황에 놓여 몰입하는데, 단정 짓는 이야기에 갇히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건만 보이게 돼요. 사건을 보고자 하면, 책을 보면 돼요. 벌어진 사건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과 반응을 하는지가 보여야 하죠. 관객들 역시 극 안의 인간군상을 보러오는 거라 생각하니까요.” (최영준)
‘사람’에 집중한 두 사람의 연기는 군더더기가 없다. 캐릭터는 선명하게 드러나고, 방대한 대사는 객석 마지막 열까지 정확하게 전달된다. 특히 롤러코스터를 타듯 감정의 낙차를 오가면서도 박지연의 딕션엔 흔들림이 없다. 그는 “전작 ‘햄릿’을 통해 선생님들과 함께 하며 단련과 공부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네 명의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장르’가 다른 역할이기에 화도 내고 울부짖는 상황도 적잖다. 관객이 박지연의 ‘성대’를 염려할 정도다.
“사실 저도 걱정했어요. 한 달간 같은 에너지로 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런데 결국 소리도 억지로 내면 상하는데 진심으로 울고 화내니 아프지 않더라고요.” (박지연)
뮤지컬 ‘맘마미아!’(2010년)로 데뷔해 어느덧 14년차 된 박지연은 이번 작품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연기의 재미를 느낀다”고 했다.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됐던 작품은 뮤지컬 ‘빨래’였다. 대대로 노래와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거쳐간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정답이 없는 무대를 함께 만들며 연습실에 가는 것만으로 재미를 느꼈다”고 했다. 이번 작품 역시 그때의 충만함을 다시금 느끼고 있다. 지난 경험의 시간과 상대 배우와 주고 받으며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즐거움이 쌓여서다. 정해진 방식이나 답을 따르기 보다 배우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재미”가 커진 때라고 했다.
이정 하동균과 함께 보컬 그룹 세븐데이즈로 활동한 최영준은 2006년 뮤지컬 무대를 통해 배우의 길을 걸었다. 가수로서의 꿈은 “방 안에서 눈물의 세븐데이즈 은퇴식”을 연 뒤 마음을 접었다. 배우를 꿈꿨지만, 배우로 안착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욕심은 많은데, 배우의 꿈을 이뤘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나 보니 그 욕심이 저를 죽이더라고요. 그래서 체념하고 꿈을 꾸지 않았어요. 그저 나의 리그에서 오늘 하루 열심히 살면, 언젠가 누군가의 꼬리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생각했던 것 같아요.” (최영준)
스스로는 2018년 연극 ‘돌아온다’를 터닝포인트로 꼽는다. 이 작품 이후 최영준은 무대와 매체를 오가며 존재감을 알렸다. 이제는 모두가 아는 얼굴이 됐지만, 지금도 그는 “연기를 잘하고 싶을 뿐 슈퍼스타가 되고 싶은 욕심은 없다”고 말한다.
지금의 최영준은 묵묵히 걸어온 지난 시간의 결과다. 긴 시간 쌓아온 연기 내공은 이번 무대에서도 확인된다. 최영준의 연기는 TV나 무대에서나 이질감 없이 스며든다. 그의 편안한 발성 안에 ‘논리’로 중무장한 샘이 있고, 인정 많은 방호식(tvN ‘우리들의 블루스’)이 있고, ‘오지라퍼’ 봉광현(‘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있다.
“무대와 매체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쉼표의 크기’에 따른 차이일 거예요. 앞 대사와 다음 대사 사이에 있는 마침표와 쉼표가 가진 크기 차이요. 숨을 어떻게 쉬느냐에 따라 다른 거죠. 만약 큰 차이를 느꼈다면 (제겐) 이 일이 재미가 없었을 거예요. 기술자 느낌이 드니까요.” (최영준)
무심히 툭툭 던지는 대사는 관객들의 귀에 훅 들어와 안착한다. 자막도 없이 이어가는 무대에서 불분명한 배우의 딕션은 관객의 입장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다. 그만큼 정확한 딕션을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최영준은 그러나, “대사는 연기 기술에 대한 카테고리가 있다면 제일 하위의 영역일 뿐”이라며 “볼펜도 물고 스트레스도 받으며 연습한 시간이 있었으나 딕션에 대한 부분은 딜레마”라고 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딕션이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배우로서의 고민이었다.
여름의 문턱부터 이어온 “수많은 반복”을 통해 그들만의 캐릭터를 만들었다. 두 배우는 연극 ‘2시 22분’에 대해 “지금 하고 있는 공연 중 가장 재밌는 공연”이라고 단언했다. 배우 스스로가 자신감을 가지고 내놓는 작품이다.
“쉽고 재밌어요. 사실 쉽고 재밌는 공연은 꽤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놓치면 후회할 공연은 별로 없어요. 안 보면 후회할 공연이에요.” (최영준)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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