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은 남로당원이었다···탈당·대한민국 충성 맹세 광고 확인
1949년 신문에 실린 ‘탈당성명서’ 통해
사회주의자 김수영의 면모와 전향 살펴
김수영 시인(1921~1968)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당원이자 문학가동맹(문맹) 맹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가 나왔다. 이 자료는 남로당 탈당과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을 담은 신문 광고다.
김명인 인하대 국문학과 교수는 ‘황해문화’ 가을호(120호)에 ‘전향한 남조선노동당원 김수영을 위하여’를 기고했다. 조은정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이 찾은 ‘탈당성명서’를 실마리로 글을 풀어갔다.
서울신문 1949년 11월19일자 2면 광고란에 실린 ‘탈당성명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해방 후 남로당과 문맹에 가입하였으나 본의 아님을 깨닷고(깨닫고) 탈당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할 것을 자에 성명함. 4282년 11월18일 충무로 4가 36의 17호 김수영.”
이 주소는 김 시인 가족이 경영한 ‘유명옥’이라는 설렁탕집 주소다. 김 시인은 1946년 4월에서 1950년 4월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김 교수는 “본인 스스로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실증 자료가 나타난 이상 이제 그가 문학가동맹의 맹원이었음은 물론 남조선노동당의 당원이었다는 사실은 루머도 추정도 아닌 사실로 확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탈당성명서 게재 전후 시인의 생애와 시 세계를 좇아간다. 김 시인은 재전향과 재재전향을 거쳤다. 1950년 8월3일 인민 의용군에 참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월북이나 입산은커녕 최소한의 투쟁도 하지 않고 전향 선언을 해버린 자신을 반성”하며 자원한 것이다. 9월28일 훈련소를 탈출했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10월11일 재차 탈출해 10월28일 서울 충무로 집 근처까지 왔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11월11일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힌 뒤 석방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성원권을 인정받는 과정으로 이는 재재전향”이다.
의용군 가입과 필사적 탈출, 포로수용소 수감과 석방 과정에서 일어난 전향을 두고 김 교수는 “진정한 사상적 전향이라기보다는 후진적인, 또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북한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의 표현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했다.
김 시인은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동경이나 신뢰는 오랫동안 포기”하지 못했다. “4·19혁명과 쿠바혁명에 대한 그의 과잉에 가까운 흥분과 몰두, 그 못지않게 과격한 시 작품들”을 예로 들며 “4·19혁명 이후 매우 적극적으로 사회주의적 비전을 드러냄으로써 여전히 반공 냉전주의를 기조로 하는 대한민국에서는 위험한 이단적 모험을 감행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사회주의적 비전은 정치·사상적 맥락에서 분리”된다. “대신 자신의 혁명적 비전을 시와 생활이라는 맥락에서 표현하는 데 진력”한다.
김 교수는 “한국 사회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그렇듯 그 역시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못 되는 대신 오래도록 관념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조차 허용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냉전적 사상 지형과 부대끼며 살아왔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고 썼다.
김 교수는 “김수영은 과연 사회주의자였던가” 묻는다. “탈당 성명도 포로수용소에서의 선택도 5·16 이후의 정치적 침묵도 결코 진정한 전향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는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사회주의자’였던가?” 다시 묻는다. “남로당원이었지만 남한에 반공 냉전적 단독정부가 들어서는 국면에서 월북도 입산도 선택하지 않았으며, 의용군이 되었으나 한 번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채 탈출을 했고, 4·19 이후에 혁명적 상황에 열광하면서도 이른바 ‘혁신계’를 포함한 어떤 정치적 결사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5·16 이후에는 정치적 성명서에 이름 석 자를 올리는 것조차도 두려워했다.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이념적 선택이면서 동시에 실천적 행동을 수반해야 마땅한 삶전체의 기투라고 한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로서는 현격한 자격 미달이었다.”
김 교수는 “실천이 따르지 못한 불철저한 것이었을망정 그는 사회주의적 신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고 봤다.
김 교수는 거듭된 ‘전향 행위’에 드리운 ‘공포와 억압’을 들여다본다. 탈당성명서는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국가보안법과 보도연맹이라는 억압 기구의 폭력과 협박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자유가 박탈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수영과 같은, 얼치기 주의자였지만 양심의 결벽성은 살아 있던 심약한 시인이 1950~1960년대의 얼어붙은 냉전분단 체제에서 사상의 최전선에 서게 되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으로 정리한다.
김 교수는 ‘국민시인’ 반열에 오른 대시인의 공산주의 정당 가입 사실이 “반공냉전주의의 잔재가 켜켜이 남아 시대착오적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 사회”에 미칠 파장을 우려하며 이같이 썼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헌법에 의해 보장된 나라 대한민국에서 누군가가 어떤 사상을 지녔고 어떠한 정치적 이력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부당한 매도와 차별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수영의 시적 성취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주고 있는 영향이 지대한 만큼, 그의 시적 성취의 자산이 되었던 그의 생각과 이력 역시 이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공동의 자산으로서 정당하게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황해문화는 가을호는 발간 30주년 특별호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하여 ? 다중재난 시대의 새로운 길 찾기’라는 제목으로 꾸렸다.
https://m.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307111638011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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