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마음 [플랫]
“아이고, 많이 늙었다.” 나와 함께 사는 박모씨는 거의 모든 드라마의 첫 회, 첫 감상을 저렇게 시작한다. “당연하지, 저 배우 나이가 몇인데, 저 정도면 나이든 티도 안 나네”라는 나의 대꾸도 늘 똑같다. 지겨우리만큼 똑같이 반복되는 이 대화가 어느 날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 누가 생각해봐도 저 배우들은 온갖 의학기술과 미용기술을 이용해 본인의 노화를 철저하게 감추거나 혹은 늦추고 있는데, 오직 여성주인공만을 굳이 꼭 집어 많이 늙었다고 평하는 패턴이 왠지 좀 거북해서 요즘은 종종 못 들은 척하고 있다.
너무 반복되는 소리라 듣기 싫은 점도 있겠다만 어쩌면 이제 그의 ‘늙었다’는 평이 대배우 언니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내 또래 연예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발언이라 더 언짢은지도 모르겠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저 사람은 나와는 달리 군살도 없고, 늘어진 피부나 잡티도 없는데 타인에게 늙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니, 도대체 좀처럼 젊어 보임을 붙잡으려는 노력조차 안 하는 나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인다는 말일까. 어쩌면 이 발언에 대한 미묘한 나의 불편함은 내 자신의 노화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운동에는 관심도 없고, 싸고 빠르고 달달한 것들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의 나는 제법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가능한 영양소를 고려해 식사를 챙겨먹고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지금의 나는 외려 절대 숨길 수 없는 두둑한 뱃살을 가지고 있다. 신기하게 등과 옆구리에서도 나이 듦이 대번에 드러난다.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면에서도 예전과는 달라서, 머리로는 다 이해했는데 무릎을 올려가며 높이 뛰라는 코치의 말을 좀처럼 수행할 수가 없다. 힘껏 용을 써봐도 기대와 달리 땅에서 겨우 발을 떼는 정도로 뛰는 내가 짠하다. 테마파크라도 가게 된다면 예전과 달리, 너무 빨라서 어지러워서 높아서 못 타는 것 천지다. 내가 이렇게 될 줄이야.
특정 외모가 더 나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런 사회여서는 안 된다고, 나이 들며 변해가는 몸 때문에 비난받거나 움츠러들어서는 안 된다고 늘 말하는 내가 정작 나의 노화를 발견할 때마다 멈칫한다. 노년은 고사하고 중년의 삶조차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셈이다. 조금씩 늙어가고 있는 40대의 나는 아주 마냥 젊지만은 않고, 누군가 타인의 노화를 굳이 지적한다면 그게 당연한 순리가 아니겠냐고 언제든 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솔직히 스스로는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모순이다. 생리학적이든 기능적이든 심지어 미학적이든 어떤 차원에서도 조금씩 전성기에서 멀어지고 있는 내 몸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솔직히 마냥 행복하지 않다. 그 마음이 늘 최고이고 싶은 자기애인지, 혹은 준비되지 않은 노년에 대한 불안감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다만 중년으로 가는 스스로의 몸에 대해 내가 느끼는 이중적이고 자기분열적인 부끄러운 혼란을 고백한다.
이렇게 오류투성이인 상태를 공개적인 곳에 털어놓는 이유는 ‘스스로 까놓고 떠들면 조금씩 벗어나진다’는 최현숙 작가님의 말을 믿어서다. 나의 노화가 멈출 리 없으니 차라리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지면, 받아들이는 마음도 좀 더 편해질까 기대해본다. 슬금슬금 중년에 접어든 나와 내 친구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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