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서사’라는 곤란함[오늘을 생각한다]

2023. 8. 2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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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1일 백화점 흉기 난동 사건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된 날 피해자의 유족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말에 주목해달라”고 호소했다. 가해자 서사의 과잉을 경계하라는 원칙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다. 가해자에게 온정적 이입을 유발하는 묘사 혹은 특별한 존재로 악마화하는 묘사들은 사건을 가해자 중심으로 설명하면서 피해자를 소외시킨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런 방식의 서술이 문제를 개인화시켜 범죄가 갖는 사회적 의미를 은폐하고 재발 방지 의지를 반감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라도 각자의 ‘이야기’는 존재한다. 범죄자에게 동기를 묻는 것은 현대 형법의 기초 원리이기도 하다. 범죄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해자의 이야기가 검토돼야 한다. 이러한 문명적 원칙은 얼핏 가해자 서사의 경계라는 또 다른 원칙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1963년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전 세계 유대인들의 격렬한 비난에 부딪혔다. 유대인 학살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해 법정에 세운 이스라엘 측 검사는 아이히만을 ‘도착적 가학적 음란증 환자’로 묘사했다. 하지만 아렌트의 눈에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얼간이에 불과했다. 이스라엘 법정은 아이히만의 범죄를 유대 민족을 향한 범죄로 보았지만, 아렌트는 이 범죄를 유대인에 몸에 가해진 인류 보편에 대한 범죄로 보았다. 유대인들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아렌트의 주장은 유대인들의 원한감정과 복수심을 곤경에 빠뜨렸다. 홀로코스트 피해자 입장에서 나치는 가장 사악한 악마의 현신과도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외국인이 나타나 나치는 악마가 아니며 아이히만은 여러분과 같이 근면 성실한 직장인에 불과하다고 말했으니 그들의 심정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 유대인 학자는 그런 아렌트를 향해 “유대인에 대한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렌트-유대인 논쟁은 가해자의 서사를 둘러싼 난감함을 잘 보여준다. 아렌트 역시 아이히만이 괴물이라 믿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참혹한 범죄자의 이야기로부터 ‘악의 평범성’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이끌어냈다. 아렌트의 통찰은 인류사에 커다란 이정표를 세웠지만, 동시에 유대 세계와의 논쟁을 통해 그러한 노력이 얼마나 큰 인간적 불편함을 가져다주는지도 함께 보여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가해자 서사를 둘러싼 문제의 핵심이 그 안에서 무엇을 바라보는가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끔찍한 범죄자가 우리와 전혀 다른 종류일 것이라는 생각은 안도감과 위로를 준다. 하지만 범죄의 타자화는 그 사건이 피해자에 대한 범죄일 뿐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범죄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우리 사회는 가해자의 어떤 ‘이야기’에 주목하는가? 그것들의 사회적 의미를 외면한 채 가해자의 특징(얼굴)에 주목하는 사회는 지금보다 얼마나 더 안전해질 수 있을까?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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