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전기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다[시네프리뷰]
2023. 8. 23. 07:12
크리스토퍼 놀런은 이번 작품에 일체의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핵실험 장면이지만 오펜하이머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삽입되는 다양한 인서트 장면도 이에 버금가는 볼거리다.
제목 오펜하이머(Oppenheimer)
제작연도 2023
제작국 미국, 영국
상영시간 180분
장르 드라마, 스릴러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
출연 킬리언 머피,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개봉 2023년 8월 15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크리스토퍼 놀런은 대표적인 ‘필름 근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에 앞서 ‘아날로그 애호가’라는 점이 먼저겠다. 그는 소위 최첨단 문명의 이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스마트폰이나 e메일도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필히 극장에서 관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당연히 그의 작품들은 이런 성향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문제는 이런 외골수적 신념이 창작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영화를 찍을 때는 필히 필름을 사용해야 한다. 후반 작업 시에는 컴퓨터 그래픽도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개는 꼭 극장 개봉이 우선돼야 하며 일정기간 홀드 백(Hold Back·1차 공개 이후 2차 매체에서 공개되기까지의 기간)을 보장해야 한다. 작은 부분의 작업까지 디지털화된 지금에는 꽤 많은 제작비를 추가하게 만들고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일이다.
이런 외형적 강박은 그가 창조하는 영화들의 내면에서도 발견된다. 최근 선보인 일련의 영화들은 이야기의 서사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까지 파괴하는 게 가능한지를 계속 시험하고 있는데 골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영화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통제함으로써 구현된다.
여전히 산만하지만 친절한 배려
이번 작품에서도 소극적이나마 놀런의 ‘시간에 대한 집착’은 계속된다.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와 대척점에 있는 루이스 스트라우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의 청문회라는 다른 시간대의 두 사건을 병치하며 진행된다. 각각 다른 2개의 청문회 사이에는 두 사람이 함께했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과거의 기억들이 공유되고 이를 통해 오펜하이머라는 복잡한 인물의 내면을 조금씩 엮어낸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물리학자로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자다. 현대사에 있어 이미 중요하게 거론되는 인물이지만, 이번 영화의 개봉에 발맞춰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특히 올해 공개된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이라는 작품이 눈에 띈다. 오펜하이머의 일생과 과업을 관습적으로 정리한 다큐멘터리로 크리스토퍼 놀런이 인터뷰이로 참여하기도 했다. 국내에는 쿠팡플레이를 통해 정식 공개됐다.
이번 작품 <오펜하이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이전까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만을 향해 내달리는 형국으로 작품을 만들며 스스로를 과시해왔던 크리스토퍼 놀런이 모처럼 관객들을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점이다.
일단 영화가 시작되면 2개의 청문회를 뚜렷이 구분하는 장(章)이 표기된다. 그리고 각각 컬러와 흑백으로 다른 시간을 구분해준다. 이것만으로도 관객 입장에서는 훨씬 수월하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다.
아날로그 특수효과와 배우들의 향연
크리스토퍼 놀런은 이번 작품을 만들며 일체의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최종적으로 그렇게 완성됐다고 알려져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작품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인 핵실험 장면이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삽입되는 다양한 인서트 장면들은 이에 버금가는 볼거리다. 신비하고 전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다양한 화면은 이야기 안에서 역동적 리듬을 만들어낸다.
더불어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과하다 싶게 사용된 음악들 역시 이런 의도를 보강하는 장치로 보인다.
영화를 보며 재미있었던 점 중 하나는 끊임없이 새롭게 등장하는 배우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작품의 특성상 남자배우들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주연을 맡은 킬리언 머피,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주축으로 조시 하트넷, 캐시 애플렉, 라미 말렉, 게리 올드먼, 케네스 브래너, 데인 드한, 매튜 모딘, 제이슨 클라크, 베니 사프디 등 개인의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이 차고 넘치는 배우들이 비중의 경중에 상관없이 등장해 향연을 펼친다. 상당수는 한때 반짝 주목받다가 지금은 시들해진 배우들이다 보니 이들의 등장목록 자체가 할리우드 현대사의 일면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워너 브러더스와 결별한 크리스토퍼 놀런
섬세한 관객이라면 왠지 낯선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에 늘 당연하게 생각돼오던 워너 브러더스의 로고 대신 유니버설 로고로 영화가 시작된다.
놀런과 워너 브러더스의 인연은 세 번째 장편영화 <인썸니아>(2002)부터였다. 이후 워너는 초대형 기획영화였던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 3부작을 순차적으로 놀런에게 맡김으로써 대형 감독으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다지게 되는 사실상의 기회를 제공했다.
놀런 역시 워너 브러더스에 대한 신뢰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2014년 개봉한 <인터스텔라>의 경우는 파라마운트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였지만, 놀런이 계약조건에 워너 브러더스를 관여시킨다는 조항을 넣어 북미 이외 지역의 배급을 맡기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워너 브러더스의 배급으로 개봉했다.
2020년 말부터 워너 브러더스와 놀런의 불화설이 피어올랐다. 코로나19로 인해 <테넷>의 개봉일을 두고 각축을 벌인 것이 시발점이었다. 연장선상에서 워너가 2021년 극장 개봉 예정 영화의 상당수를 자사 VOD(주문형 비디오·Video On Demand) 서비스인 HBO 맥스와 동시 개봉하기로 한 데에 놀런이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면서 결국 이들의 결별은 현실이 됐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뜻밖의 여파 중 하나다.
<오펜하이머>의 언론시사회가 있었던 날 오전, 공교롭게 워너 브러더스가 <바비>에 이어 여름 영화 시장에 승부수로 내놓은 <메가로돈 2>의 언론시사회가 있었다. 한국 개봉일도 같다. 바라보는 분위기와 완성도 면에서 두 작품의 차이가 크다 보니 더욱 대비되는 모양새다. 아무래도 워너 브러더스 담당자들의 심정은 복잡했을 듯하다.
최원균 무비가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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