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자고 보던 예능, 이젠 살자고 본다? 일상 파고든 ‘재난 예능’

남지은 2023. 8. 2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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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버스’ ‘생존게임’ 등 위기 대처법, 안전습관 알려줘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는 좀비로 아수라장이 된 거리. ‘좀비 버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여기는 연애 프로그램 촬영 현장. ‘짝’을 찾아 나온 출연자가 갑자기 상대를 공격한다. 목을 물어뜯는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도망가기 바쁘고, 출연자는 또 다른 이들을 쫓아가며 공격한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가 지난 8일 선보인 8부작 예능 프로그램 ‘좀비 버스’의 한 장면이다. 노홍철, 박나래, 딘딘, 이시영, 덱스, 유희관 등 생존자들이 좀비가 들끓는 세상이라는 세계관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며 탈출 버스에 오른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고 출발하라’ 같은 임무만 주어질 뿐, 누가 좀비한테 물릴지 등은 정해져 있지 않다. 박진경 책임피디(CP)는 “대본은 없다. 제작진은 다리가 아파 움직이기 힘든 박나래가 가장 먼저 좀비에 물릴 거라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덱스가 (동료를 구하려고) 줄을 타고 좀비가 있는 곳에 내려갈 줄도 몰랐다”고 했다.

예능 생리에 익숙한 출연자들의 행동이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거리와 카페처럼 익숙한 장소에서 갑자기 출몰한 좀비를 피하는 모습에서 현실의 재난 상황이 떠오른다. 한 시청자는 개인 블로그에 “거리를 걷는데 좀비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유희관처럼 좀비가 될까? 노홍철처럼 혼자 도망갈까? 덱스처럼 동료를 구할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생존 게임 코드 레드’에서 알려준 침수 차량 탈출법. 한국방송 제공

길을 가다 이유도 없이 공격당하는 공포스러운 현실, 요즘 ‘좀비 버스’ 같은 이른바 재난 예능이 속속 등장하고 인기를 끄는 이유다. 지난 5일 종영한 ‘생존 게임 코드 레드’(KBS2)가 소개한 여러 사례들은 여전히 온라인에서 화제다. 곽범, 모태범 등 출연자들이 화재, 납치, 차량 전복 등 위기 상황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대처법을 알려준다. 지난 6월 침수 차량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제시한 방영분은 7월 오송 지하차도 참사 뒤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곽범은 “프로그램을 하면서 일련의 사건들이 생각나 눈물이 날 것 같은 회가 있었다. 그런 사건이 없어지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했다. 고세준 피디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실제 상황 속에서 생존 방법을 얻어가길 바랐다”고 말했다. 한국방송은 다중밀집 안전사고, 비상소화장치 사용법 등 일상 속 안전 습관을 소개하는 ‘불편해도 괜찮아’를 1텔레비전에서 방영 중이다.

지난 6월 공개한 오티티 디즈니플러스(+) ‘더 존: 버텨야 산다’ 시즌2도 시즌1보다 재난 상황을 좀 더 반영했다. 당진 종합병원, 인천 대이작도 풀등모래섬 등 실제 장소에서 활용해 폐건물이나 물에 잠기는 섬에서 버티기 등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재난을 간접 체험하도록 한다. 웃음이 중심이지만, 그 안에 깨알같은 정보도 담겨 있다. 이 밖에도 ‘용감한 형사들’(E채널)과 ‘풀어파일러’(AXN)는 시즌3을 앞뒀거나 방영 중이다. 두 프로그램은 프로파일러와 형사가 출연해 실제 범죄 사건을 분석한다. 2005~2016년 방영한 한국방송 ‘위기탈출 넘버원’을 다시 보고 싶다는 시청자 의견도 쏟아진다. 한국방송 유튜브 채널에는 22일 오전에도 ‘무거운 물체에 신체가 깔려 발생하는 ‘압좌증후군’편을 다시 보여달라’는 요청이 올라왔다.

유재석이 시청자 의견 참고해 위기 모면하는 인터랙티브 예능 ‘플레이유’ 시즌2. 카카오페이지 제공

재난 예능은 인터랙티브 플랫폼이 발전하면서 몰입감을 키우고 있다. ‘플레이유’(카카오티브이)는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제안하는 전략을 참고해 유재석이 위기에서 탈출하는 예능으로, 지난 4월 시즌2인 ‘플레이유 레벨업: 빌런이 사는 세상’(카카오페이지)을 공개했다. 피시(PC)방 테러 협박, 보험사기 등 여러 상황에서 집단 지성이 유재석을 구해내야 한다. 인터렉티브 기술은 재난 영화·드라마도 차용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은 2020년 12월 시즌1 공개 뒤 시청자가 여러 선택을 하며 극중 아파트에서 탈출하는 유튜브 콘텐츠를 선보였고, 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이 배경인 개봉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관객이 생명수를 획득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한 프리랜서 예능 피디는 “국내에서도 넷플릭스 등의 영향으로 제작비가 늘면서 재난 예능을 더욱 사실감 있게 표현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위기 대처법이나 안전 습관을 알려주는 예능은 이전에도 있지만 요즘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수년 사이 자연재해나 묻지마 범죄 같은 일들이 자주 벌어지면서 몰입도가 달라진 것 같다”며 “좀비로 변할 동료를 데리고 갈 것인가 버릴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는 과정에 나를 대입하면서 인간 내면을 관찰할 기회도 제공한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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