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빠지는 세운지구 세입자 대책···서울시, 공공임대상가 잇따라 축소

유경선 기자 2023. 8.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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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상생지식산업센터에서 내려다본 세운지구 5구역 일대. 유경선 기자

재개발이 한창인 서울 중구 을지로에는 ‘도심 제조산업’에 종사하는 기술장인들이 수십년에 걸쳐 형성한 산업단지가 있다. 서울시는 2020년 이 일대인 세운지구를 재개발하며 도심산업도 보존하겠다는 계획을 내놨지만, 당시 보존대책은 현재 조금씩 힘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가 3년 전 내놓은 ‘세운상가 일대 도심산업 보전 및 활성화 대책’은 1년여간 자치구와 전문가, 당사자, 유관기관 등이 산업실태조사와 의견수렴 등을 거쳐 수립한 계획이다. 도심산업 보존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 대부분이 세입자인 세운지구 산업 종사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이 대책의 취지다.

핵심은 공공임대상가 건립이었다. 재개발구역 안에 공공임대상가를 지어 기술장인들을 입주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재개발 진행과 세입자 보호를 양립할 수 있는 데다 도심산업도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22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시의 공공임대상가 건립 계획 일부가 취소·축소되고 있다. 을지로 도심 제조산업이 수십년 명맥을 잃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공공임대상가 건립 계획 축소·취소···상권 활성화 대책 없어 “몇 년 안에 폐업자 나올 듯”

공공임대상가 건립 계획은 당초보다 상당 부분 축소됐다. 이미 문을 연 공공임대상가에서도 과거 약속했던 상권 활성화 대책은 전무하다는 현장 불만이 나온다.

서울시는 세운3~5구역 안에 총 560호 규모의 공공임대상가를 확보하고, 6구역에 인쇄산업을 위한 시설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중 3구역 공공임대상가 건립 계획은 백지화됐다. 6구역 인쇄산업앵커시설도 예산 부족을 문제로 잠정 취소됐다.

5-2구역에 지난달 20일 공공임대상가 ‘상생지식산업센터’(약 60호)가 문을 열었지만, 외부 간판 등 센터를 알리는 안내조차 없어 건물 용도를 알기 어려웠다. 지난 6일 찾아간 1층 상가는 외부 접근이 가능하지만 2층 이상부터는 영업장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상생지식산업센터 2층 공간. 당초 ‘아뜨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상권 활성화를 위한 예술가들과의 합동 전시 공간 등 용도로 쓰일 계획이었지만 현재까지 프로그램이 없는 상황이다. 유경선 기자

입주 상인들은 상권 활성화 프로그램이 전무하다고 하소연했다. 서울시가 상가 완공 후 지역 활성화를 위해 예술가들과의 합동전시 등 프로그램을 제공한다고 했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건물 맨 위층에 오세훈 서울시장의 중점 사업인 청년취업사관학교 캠퍼스가 문을 열었다.

센터 2층에 입주한 양혁태씨는 “외부에 업체 간판을 달아주기로 했는데 이야기가 없고 새 고객도 유입되지 않는다”며 “조금만 홍보를 지원해주면 효과가 있을 텐데 몇 년 안에 못 버티고 나가는 사람들이 생길 것 같다. ‘상생’지식산업센터라는 명칭이 무색하다”고 말했다. 입주자 대표인 조무호 태광정밀 대표는 “건물이 청년취업사관학교로 쓰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원래 계획 때와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입주 상인들은 재개발에 따른 영업 공백, 사업지 변경, 임대료 상승 등으로 매출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도심 제조업은 도시 경쟁력···보존할 부분 지키는 것이 공공의 역할”

도시 한복판에서 디자인부터 생산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도심 제조업의 특성은 중요한 도시 경쟁력 요소다. 시제품 제작, 다품종 소량생산이 가능한 만큼 도시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바로 실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운지구에서도 기계·정밀공업, 금속가공업, 전기·전자공업, 인쇄업이 수십년간 번성해 왔다. 재료 주문과 재단, 가공, 조립까지 이 일대에서 하루 안에 끝낼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미국 뉴욕시는 도심 제조업을 보존하기 위해 2005년 별도의 산업지구를 지정했다.

안근철 청계로을지로보존연대 활동가는 “세운지구는 시험 제작이나 소품종 생산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라며 “노후 환경을 개선하더라도 제조 관련 기능은 남겨둬야 하는데, 제조 관련 시설도 모두 주거 용도로 전환하는 것은 지나치게 획일적인 도시 계획”이라고 말했다.

배웅규 중앙대 도시공학과 교수도 “도심 제조산업은 신사업의 테스트베드이자 도심특화용도로 기능할 수 있다”며 “영국 런던 테크시티처럼 제조·업무·주거가 융복합하는 도심지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기존의 산업을 무책임하게 쫓아내고 소멸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이어나갈 부분은 보존될 여지를 만드는 것이 공공의 역할”이라고 했다.

2019년 1월17일 서울 청계천 관수교에서 열린 ‘시민, 예술가, 메이커, 디자이너, 연구자 청계천 을지로 재개발 반대 총궐기 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청계천 공구거리를 지켜달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서울시 “도심산업 보존·세입자 보호 최대한 반영하겠다”

도심산업 보전과 세입자 보호 대책이 퇴색되고 있다는 지적을 서울시도 일부 인정하는 분위기다. 서울시 관계자는 “앞으로 추진되는 공공임대상가 신규 건립에는 2020년 계획을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공공임대상가 규모가 얼마나 축소되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모든 계획이 확정된 것이 아니어서 정확히 얼마나 줄어든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서울시 관계자는 “다양한 도심 활성화 정책으로서의 제조산업 보전 필요성에 공감한다”면서도 “당초보다 보전 대책에 힘이 빠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세운지구 종합 계획을 세울 때 도심산업과 세입자 대책을 최대한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생지식산업센터 프로그램이 부족하다는 지적에는 “현재 상권 활성화 지원 등 구체적인 계획이 정해진 것은 없다”며 “요구사항 등을 자치구와 챙겨보겠다”고 했다.

유경선 기자 lights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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