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귀’, 김은희 월드의 씻김굿 [K콘텐츠의 순간들]
드라마 〈악귀〉(SBS)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염해상(오정세)은 평소 운전할 때 진도씻김굿 음악을 듣는다. 염해상이 민속학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더 은밀한 사정이 있다. 해상은 어릴 때부터 귀신을 볼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엄격히 분리된 죽음의 세계가 그에게는 지척에 있었다. 염해상이 항상 틀어놓는 씻김굿 장단은 그 본래의 목적대로 망자들을 향한 음악이었던 셈이다.
이 장면은 꽤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망자를 위한 애도의 서사야말로 ‘김은희 월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의 비극은 대부분 억울하게 죽임당한 망자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되고, 그에 얽힌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유언을 들어주는 해원의 성격에 가깝다. 이 같은 세계관의 토대가 된 드라마 〈싸인〉(SBS)이 단적인 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의 주인공은 법의학자 윤지훈(박신양)이다. 냉정한 성격의 그는 싸늘한 주검 앞에서만은 따뜻한 사람이 된다. 그에게 부검이란 단지 사인을 밝히기 위한 직업적 행위를 넘어서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주는 애도의 성격을 띤다.
김은희 월드의 정점이라 평가받는 〈시그널〉(tvN)에서도 유사한 태도가 발견된다. 장기 미제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원인도, 범인도 찾지 못한 김윤정 어린이 유괴 살인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로 출발한다. 유가족들의 피맺힌 절규와 15년 동안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잊혀가던 아이의 죽음은, 이를 항상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던 친구 박해영 경위(이제훈)에 의해 그 진실이 드러난다. 사건을 해결한 해영이 윤정에게 국화꽃을 바치자 그 앞에 환상처럼 나타난 아이의 환한 모습은 추도의 드라마를 완성하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최근작 〈악귀〉에 이르러, 김은희 월드의 애도 서사는 본격 오컬트 장르의 틀을 입고 산자와 망자의 직접적 소통으로 발전한다. 극 중 주인공 구산영(김태리)은 오래전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의 유품을 전달받은 뒤로부터 이상한 일에 휘말리고, 이내 자신에게 악귀가 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염해상은 구산영을 찾아온 악귀가 어린 시절 그의 모친을 죽게 만든 악귀와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산영과 함께 그 실체를 추적한다. “악귀를 만나면 이름이 뭔지, 왜 여기에 남은 건지 얘기를 들어줘야 한다”라는 해상의 말은 〈싸인〉 속 윤지훈의 대사를 연상시킨다. 〈악귀〉의 사건 해결 과정은 그 자체로 씻김굿의 행위와 닮아 있다.
〈악귀〉의 본질이 애도의 서사라는 점은, 퇴마가 중심인 다른 오컬트 드라마들과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손 더 게스트〉(OCN), 〈방법〉(tvN), 〈경이로운 소문〉(OCN), 〈괴이〉(티빙) 등 대부분의 오컬트 드라마 속 악귀들은 한 세계의 종말을 불러올 만한 거대한 존재들이며, 그와 맞서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거악에서 세계를 구하는 영웅서사의 성격을 지닌다. 반면 〈악귀〉의 귀신은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의 한이 응축된 원귀다. 주인공들이 목숨을 걸고 알아내야 할 진실은 그 분노의 사연이다. 김은희 월드는 그렇게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을 한 세계의 종말과 같은 무게로 그려낸다.
드라마에서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끌어온 악의 근원이 바로 인신공양이다. 집단의 평온을 위해 개인을 제물로 삼는 이 악습은, 뒤집어보면 한 생명이 지닌 엄청난 가치를 말해준다. 〈악귀〉는 우리 민속에서 인신공양의 성격을 띤 염매와 태자귀를 소재로 하고 있다. 염매는 어린아이를 굶겨 죽여 어른들의 흉사를 풀기 위해 행했던 주술이고, 이때 제물이 된 아이는 태자귀로 불렸다. 극 중의 악귀는 1958년 장진리라는 마을에서 행해진 염매 주술 과정에서 탄생한다.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 ‘그래, 살아보자’
이 작품에서 장르적으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은 악귀가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서사적으로 가장 소름 끼친 순간은 태자귀의 진실이 밝혀진 장면이었다. 제물로 팔아넘겨진 아이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동안 어른들은 몸값으로 받은 물건들로 마을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를 사주한 자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7화에서 악귀의 시점을 통해 염매의 실체를 알게 된 구산영이 악귀를 만든 장본인들 앞에서 오열하며 소리치는 장면은 단연 이 드라마의 압권이자, 악귀가 생전에 못다 한 마지막 일갈과도 같았다.
한 사람의 희생을 세계의 종말처럼 그리는 김은희 월드의 묵직한 메시지는 모든 죽음의 무게가 동등하게 다뤄지지 않는 요즘 시대에 더 깊이 와닿는다. 어떤 죽음은 삶보다 더 적나라하게 불평등한 현실의 모순을 드러낸다. 김은희 월드에서 희생당한 이들은 대부분 소외된 약자였고 그렇기에 더 빠르게 잊혔다. 〈악귀〉 속의 원귀도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은, 철저히 잊힌 존재였다.
죽음을 무겁게 다루는 김은희 월드는 역으로 삶의 가치에 더 힘을 실을 수 있었다. 그 이전의 작품들이 망자의 묘 앞에서 추모하는 장면으로 애도를 표했다면, 〈악귀〉는 한발 더 나아가 망자와 산자 모두가 바람을 적는 기원의 서사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화에서 전통적인 기원 행사인 선유줄불놀이 현장을 찾은 산영과 해상은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이때 산영의 마지막 대사는 ‘그래, 살아보자’였다. 이는 악귀가 죽어서도 그토록 간절하게 집착했던 소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김은희 월드는 죽음의 무게를 통해 역으로 생명의 존엄을 강조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한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고.
김선영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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