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김수영 시인, 남로당 가입·탈당 첫 확인 “‘위장전향’한 듯”

최재봉 2023. 8. 2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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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 김명인 교수 분석
김수영 시인. 한겨레 자료사진

김수영(1921~1968) 시인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 가입했다가 탈당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김수영은 6·25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의용군 문화공작대에 가담해 북으로 올라가 군사훈련을 받고 전선 배치를 기다리던 중 탈출했으며, 서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찰에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되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가 의용군에 들어가기 전에 남로당에 가입한 적이 있으며 그 뒤 탈당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문학자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25일 발행되는 ‘황해문화’ 30주년 기념호에 특별기고 형식으로 발표한 글 ‘전향한 남조선노동당원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이런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김수영의 남로당 가입과 탈당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서울신문 1949년 11월19일치 2면 광고란에 실린 그의 탈당성명서다. 이 성명은 “본인은 해방 후 남로당과 문맹에 가입하였으나 본의 아님을 깨닫고 탈당하는 동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할 것을 자에 성명함. 4282년 11월 18일 충무로 4가 36의 17호 김수영”이라 돼 있는데, 성명 말미의 주소는 김수영의 가족이 운영했던 설렁탕집 유명옥의 주소와 일치한다. ‘문맹’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줄임말로, 해방 뒤 좌익과 중도 성향 문인들이 결성한 문인 단체다.

김수영이 서울신문 1949년 11월19일치 2면 광고란에 실은 탈당성명서. 조은정 제공
김수영의 탈당성명서가 실린 서울신문 1949년 11월19일치 2면. 조은정 제공

김수영의 탈당성명서를 처음 확인한 이는 조은정 현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다. 그는 2018년 박사학위논문 ‘해방 이후(1945~1950) ‘전향’과 ‘냉전 국민’의 형성: ‘전향성명서’와 문화인의 전향을 중심으로’에서 이 성명을 확인하고 논문에 간략하게 사실만 기록해 놓았으며 지난 5월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이 주최한 ‘한국현대사와 회복의 인문학’ 제12차 비대면 온라인 콜로키움에서도 발표문에 첨부 형식으로 탈당성명서를 덧붙였다. 이 콜로키움에 토론자로 참석했던 김명인 교수는 ‘황해문화’ 기고문에서 김수영의 탈당성명서가 지니는 의미와 맥락, 그의 생애 및 문학과의 관련을 살폈다. 김 교수는 연구서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을 냈으며 2008년에는 ‘“김일성 만세”’, ‘연꽃’ 등 김수영의 미공개 시 15편과 산문 30여편을 발굴해 공개한 바 있다.

김명인 교수는 기고문에서 김수영이 “문학가동맹과 모종의 관련이 있었으리란 것은 (…) 어느 정도 확인된 바 있으나, 그가 문학가동맹의 정식 맹원이었다는 것은 확정된 바가 없었다. 더구나 그가 남로당의 당적까지 가졌다는 것은 전혀 밝혀지거나 심지어 추정된 적도 없었다”며 이번 자료 공개로 김수영의 문학가동맹 및 남로당 가입은 “사실로 확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썼다. 조은정 연구원은 학위논문과 발표문에서 1948년 12월부터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전까지 “보도연맹 가입의 전제 조건으로 여러 형태의 좌익 연루자들의 ‘전향성명서’ 발표가 강제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전향은 서울 및 지방의 일간지 광고란에 거의 규격화된 성명서를 게재하는 형식으로 시행됐는데, 조 연구원은 중앙 일간지 5개와 지방 신문 5개를 전수 조사한 결과 황순원, 박인환, 이원수, 이봉구, 이무영, 박영준, 박노갑 등 문인 수십명의 전향 성명서를 확인했다.

김명인 교수는 김수영의 미완의 자전적 장편소설 ‘의용군’에 묘사된 주인공의 행적을 근거로 그가 “임화의 권유로 이미 1945년 말경 남로당 이전의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가입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며, 김수영이 전쟁 중에 의용군에 가입했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그의 탈당과 전향은 “탄압의 서슬에 못 이긴 ‘위장전향’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고 썼다. 의용군으로 북에 올라갔다가 탈출한 일은 당시 북한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의 표현이었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이나 신뢰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포기되지 못했다”고 김 교수는 파악한다. 1960년 4·19 혁명을 전후해 발표한 시들에서 그 점은 뚜렷하게 보이지만, 그 이전과 이후의 시들에서도 “혁명의 이념적 지향”,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5·16 이후 “긴 좌절과 침잠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서 김수영은 “현실을 직접 바꾸는 정치사회적 혁명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대신 시를 통한 혁명, 또는 시의 혁명을 도모하”기로 했고 그런 태도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진다.

김명인 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김명인 교수는 22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누르는 비정상적 정치 상황에서 거듭된 강제 전향의 충격과 상처가 김수영과 같은 문제적 인물을 낳은 것”이라며 “그것은 비극적이지만 또한 역설적이게도 한국 문학의 세계적 의미와 성과를 가능케 한 조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김수영의 탈당성명서가 비록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념적 매도가 아니라 생산적 토론과 소통을 위한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은정 연구원도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이념적인 이유로 김수영의 시를 교과서에서 빼자는 주장들도 있어서 김수영의 남로당 탈당 사실을 공개하는 게 주저되기도 했지만, 윤리적 문제와 이념적 문제는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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