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읽기] 현대건축보다 뛰어난 장경판전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경남 합천의 가야산 59번 숲속 도로를 달리다보면 해인사(海印寺)가 우리를 맞아준다.
802년 '순응'과 '이정'이 창건한 해인사에 1488년부터 팔만대장경을 보관함으로써 삼보(三寶: 佛·法·僧) 사찰 중 법보(法寶) 사찰이 되었다.
많은 화재로 해인사의 모든 전각이 소실됐을 때에도 오직 장경판전만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대장경판을 지키기 위하여 불침번을 365일 24시간 세우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남 합천의 가야산 59번 숲속 도로를 달리다보면 해인사(海印寺)가 우리를 맞아준다. 802년 ‘순응’과 ‘이정’이 창건한 해인사에 1488년부터 팔만대장경을 보관함으로써 삼보(三寶: 佛·法·僧) 사찰 중 법보(法寶) 사찰이 되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16년(1236∼1251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1962년에 국보 제32호 해인사대장경판으로 지정되었고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돼 2007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엄청난 분량의 목판을 제작한 것도 대단하지만 놀랍게도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 이유는 건물이다. 1488년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대장경판을 보관하기 위하여 두개 동으로 건축한 장경판전(국보 제52호· 사진)에는 놀라운 과학이 있다. 첫째는 장경판전의 배치다. 가야산 중턱에 남서향으로 배치함으로써 목재에 치명적인 여름의 습하고 더운 남동풍을 차단하였다. 둘째는 풍부한 일조량 확보이다. 건물 안까지 풍부한 일조량이 확보돼 실내의 습하고 눅눅한 기운을 제거했다. 셋째는 건물 구조이다. 장경판전은 독특하게도 건물의 정면과 뒷면의 창의 크기가 다르다. 정면의 아래 창은 위 창보다 4.6배 크고, 뒷면의 아래 창은 위 창보다 1.5배 작다. 단순해 보이는 붙박이 창이지만 공기를 순환시키는 과학적인 구조로 설계하였다. 넷째는 바닥이다. 바닥을 깊게 파고 숯과 소금·횟가루를 모래와 찰흙에 섞어서 다져 놓음으로써, 장마철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할 때는 흙 속의 수분을 내보내 대장경판과 건물이 적절한 습도를 유지하였다. 한때 최신 설비를 갖춘 현대식 건물을 짓고 대장경판을 옮겼다가 오히려 목판이 변형되는 문제가 발생돼 다시 장경판전으로 옮기는 해프닝도 있었다. 현대 과학기술로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해결하는 놀라운 과학과 기술의 건축공학인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두번째 이유는 사람이다. 많은 화재로 해인사의 모든 전각이 소실됐을 때에도 오직 장경판전만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대장경판을 지키기 위하여 불침번을 365일 24시간 세우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에도 위기를 맞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지 못한 1000여명의 북한군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에 유엔(UN·국제연합)군에서는 폭격기 4대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당시 공군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소실될 것을 우려해 목숨을 걸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로써 해인사는 폭격당할 위기를 넘기고 오늘까지 보존됐다. 현재 해인사 경내에는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을 보며 장구한 세월 보존하기 위하여 애쓴 모든 분들께 머리를 숙여 감사드린다.
이규혁 건축가·한옥작가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