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도 울린 詩 해설… 문학을 잘 몰랐기에 가능했어요
“백석 시인이 조선일보 기자였잖아요. 큰 키에 양복 입은 그가 나타나면 신문사 근처가 파리 몽파르나스 거리가 된 듯했다고 해요….” 지난 16일 만난 정재찬(61)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끊임없이 말을 이어 질문할 새도 없었다. 그는 2015년 출간돼 18만부 팔리며 독자들에게 ‘시적인 마음’을 되살려준 에세이 ‘시를 잊은 그대에게’의 저자. 조용한 스타일일 거란 짐작은 3분 만에 부서졌다. “사범대에 진학하는 바람에 전혀 뜻하지 않은 길을 걸었어요. 뜻대로 풀렸으면 제 성격에 정치인이 됐을지도요.”(웃음)
정 교수는 ‘시를 잊은 그대에게’ ‘그대를 듣는다’(2017)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들’(2020) 등을 출간하며 ‘시(詩) 에세이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 한 편을 두고 일맥상통하는 대중가요, 영화 내용까지 엮어 시에 담긴 섬세한 감성을 읽어주는 책들이다. 교과서에서 이미 만났던 시들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하고, 숨겨진 좋은 시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해설이 세게 마음을 때릴 때가 있다. ‘유년의 윗목, 어쩌면 유년 전체가 윗목 아랫목 따로 없는 냉골이었으리라. 거기에, 차라리 모두 차가우면 나았을 것을, 하필이면 뜨거운 것이 오직 눈시울뿐이다.’(기형도 ‘엄마 걱정’ 해설)
작가로서 그의 이름을 알린 ‘시를 잊은 그대’는 그가 한양대에서 공대생 대상으로 진행해 기립 박수를 받은 강의 내용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고를 먼저 썼다. “2006~2007년에 다 썼는데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도 아닌 제가 이런 책을 내는 게 쑥스러워 출간을 미뤘죠.” 2015년 출판사 부사장이 원고를 집에 들고 가 읽어보다가 울어버린 탓에 초판에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라는 부제가 붙었다. 그는 뜻밖에도 시가 자신의 ‘콤플렉스’였다고 이야기했다. 문학도의 길이 중도에 접혀 대신 ‘시를 전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 “유년 시절 ‘문학 청년’과는 거리 멀었고, 외향적이고 공부 잘하고 말 잘하는 스타일이었죠. 사범대를 가게 돼 굉장히 낙담했죠”. 하지만 국어교육을 전공하며 문학 세계에 빠졌다. “고(故) 김윤식 교수라는 거목 밑에서 이끼로만 살아도 행복하겠다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국문과 박사과정 시험에서 연거푸 떨어졌다. 몸이 아프고 시험 공포까지 생겼다. 인생의 큰 좌절이었다. 결국 사범대 대학원을 갔다. 그는 “지금은 ‘뜻하지 않은 길도 길’이라는 것을 알았고 감사한 마음”이라며 “이런 길을 걸었기에 대중에게 시를 전달하는 책도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순수문학 관점에선 오히려 제 책을 환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저는 시가 주는 효용을 더 중시하기에 이런 책을 쓸 수 있습니다. 제 정체성은 ‘문학 교사’에 가깝죠.” 그는 “늘 시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고, 그 빚을 갚는 것이 나의 몫이라 여긴다”며 “책 쓰고 강연하는 것 외에 한국 시의 세계화를 위한 문도 두드리고 있고, 시가 공익에 기여할 방안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인문학의 최종 목표는 ‘성찰’이며, ‘쓸모없음’이 쓸모 있을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인데, 요즘 인문학은 ‘쓸모 있는 것’만 남은 듯하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쓸모 있는 ‘지식’만 주목한다는 것이다. “읽는 사람들만 읽는 게 문학이 됐다”며 “문학의 매력도를 높여서 많은 이가 찾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현재 ‘육사와 동주’를 함께 다루는 대중서를 집필 중이다. 글을 쓸 때는 반복적으로 읽어보며 자연스럽게, 리듬 있게 읽히는지를 확인한다. 그는 “작가는 자기 글의 최초 독자이므로, 독자로서 안목이 후지면 좋은 글을 쓸 수도 없다”며 “좋은 글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고 했다.
[정재찬이 말하는 ‘시의 힘’]
공명(共鳴), 남과 함께 우는 일
공명은 한자 뜻 그대로 남과 더불어 우는 일이다. 남의 감정에 공명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하다. 시를 가까이 하면 공명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는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처럼, 시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이들에게 슬픔과 같은 감정을 선물한다. 고통을 모르는 이에게 고통을 느끼게 해 주고, 슬픔을 모르는 이에게 슬픔을 느끼게 해 준다. 남이 울면 따라 울 수 있는 것, 슬퍼할 줄 아는 사회에는 희망이 있다.
‘시(詩)스타그램’의 가능성
수업 중에 ‘여러분 그 영화 봤어요?’ ‘그 소설 봤어요?’ 물어보면 봤다는 사람이 절반을 넘는 적이 없다. 하지만 시는 그 자리에서 함께 읽고 공유할 수 있다. 신속하고 간결한 것을 선호하는 소셜미디어 시대에 시가 가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인스타그램’에서 시를 마치 사진처럼 공유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의 폐해가 많다고 하지만, 잘 이용하면 멀리 있어 직접 닿을 수 없는 타인들을 따뜻하게 안아줄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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