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137] 적십자사와 한국은행
전쟁은 언제나 참혹하다. 1859년 이탈리아의 솔페리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단 하루 만에 무려 4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업차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한 앙리 뒤낭이 큰 충격을 받았다. 1862년 자신이 목격한 참상을 담아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그리고 박애운동에 뛰어들었다.
앙리 뒤낭은 타고난 금수저였고, 그의 본업은 은행가였다. 그런데 박애운동에 몰두하다 보니 본업을 소홀히 했다. 자기 재산을 다 날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한테 재산을 맡긴 친구들까지 파산시켰다. 그런 점에서 뒤낭은 실패한 은행가였다.
그가 설립한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진로도 순탄치 않았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적십자 대신 적신월, 즉 붉은 초승달을 고집했다. 이스라엘의 반발은 훨씬 심했다. 자신들이 형벌 수단으로 삼았던, 부끄러운 십자가를 로고로 쓰는 것을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십자가 대신 ‘붉은 다윗의 별’을 고집했다. 2006년에 이르러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미국 국무장관의 중재로 겨우 화해했다.
1864년 8월 22일 12개 국가가 제네바에 모여 ‘제네바협약’을 체결했다. 1903년 대한제국도 협약을 체결했다. 한국전쟁 중에 대한적십자사는 피란민들에게 구호 물자를 배급했다. 국제적십자사연맹에 연락해서 밀가루와 의약품을 빨리 받아오려면, 영어를 잘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영국에서 공부한 윤보선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임명했다.
그때 윤보선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이었다. 금수저로 태어나 본업은 금융인, 부업은 박애가라는 점에서 앙리 뒤낭과 똑같았다. 윤보선은 한국은행 총재를 찾아가 재정 감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헌혈 사업을 담당하는 적십자사와 ‘경제의 피(돈)’를 공급하는 한은을 ‘혈맹’으로 본 것이다. 2002년까지 52년 동안 역대 한은 총재들이 그 명예로운 겸직을 흔쾌히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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