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가 공포 대상으로… 살 떨리는 딜레마
내달 개봉하는 영화 ‘잠’
영화 ‘잠’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얼굴이 내가 모르는 소름 끼치는 얼굴로 바뀌는 공포를 건드린다. 남편 현수(이선균)는 잠만 들면 몽유병 환자처럼 괴이한 행동을 일삼고, 아내 수진(정유미)은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었을 때, 멀어질 수도 없고 가까워질 수도 없는 딜레마를 긴장감 있게 그려냈다. 주연배우 정유미는 우리가 알던 밝고 해사한 얼굴에서 광기 어리고 푸석푸석한 얼굴로 변하며 그간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서 연출팀으로 일한 유재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올해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받은 데 이어 토론토 국제 영화제,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등 해외 유수 영화제의 러브 콜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은 “최근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라는 평과 함께 정유미·이선균의 연기에 대해서도 “미친 연기”라는 극찬을 보냈다. 22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정유미(40)는 “촬영장에선 모니터를 하지 않는 편이라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 저도 제 얼굴에 놀랐다”고 했다.
아내 ‘수진’은 남편의 수면 중 이상행동을 치료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남편이 다칠까 봐 손에 오븐 장갑을 끼워주고, 남편 앞에서 PPT를 펼치는 등 엉뚱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다. ‘윰블리’(유미+러블리)라는 별명처럼 정유미의 사랑스러운 이미지가 독특한 영화 분위기에 한몫했다. 정유미는 “촬영할 땐 전혀 웃긴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칸 영화제에서 상영될 때 많이들 웃으시더라. 한국 관객들이 어떻게 보실지도 궁금하다”고 했다.
‘82년생 김지영’으로 대종상 영화제에서 첫 여우 주연상을 받은 이후 4년 만의 스크린 복귀다. 처음엔 집에 갇힌 아이 엄마 캐릭터가 겹치지 않을까 우려도 했다. “감독님이 ‘김지영은 고통을 안으로 삼키는 캐릭터라면, 수진은 진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캐릭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감독님을 더욱 믿게 됐죠.”
영화는 냉장고, 수돗물, 곰솥까지 집 안의 일상적인 소재를 공포에 영리하게 활용한다. 곳곳에 단서를 숨겨놓고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는 미스터리 영화의 치밀함도 갖췄다. 정유미는 “대본이 간결했고, 현장에서 본 감독님도 대본만큼이나 군더더기 없는 스타일이었다”라고 했다. “저예산 영화에선 1분 1초가 아깝거든요. 감독님이 머릿속에 그림이 있고,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표현해줘서 오히려 연기하기 편했어요.”
정유미는 “그날그날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연기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선생님이 원하는 것 이상을 또박또박 해내는 모범생을 보는 듯했다. “감독님이 표현하라는 대로 표현해 낼 때가 제일 재밌어요. 감정을 쏟아야 할 때도 있지만, 기술적으로 연기해야 할 때도 있거든요. 카메라, 조명 모두 합을 맞춰야 하는데 내 감정만 쏟아낼 순 없잖아요. 기술을 들키지 않고 감정을 연기했을 때 쾌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정유미 편애설’이 불거지기도 했다. 2018년 영화 ‘염력’에서는 해맑은 미소로 악행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로 생애 첫 악역을 맡았다. 매력적인 캐릭터 덕에 함께 출연한 배우 류승룡은 “연상호 감독이 정유미를 편애한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연상호 감독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캐릭터도 정유미가 맡으면 입체적이 된다”고 해명했다.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지만, 그의 사이코패스 연기는 쇼츠(짧은 영상)로 만들어져 유튜브에서 1046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정유미는 “‘맑은 눈의 광인’이라며 좋아해주시더라. 조금 더 광기를 드러내야 했나 아쉽다”고 자신을 낮췄으나, 그는 이번 영화에서 귀신도 진저리칠 만한 광기를 보여준다. 남편 때문에 잠을 못 이루던 아내가 반격에 나서면서 영화는 변곡점을 맞는다. 잠이 들면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하면서 사실상 1인 2역을 천연덕스럽게 표현한 이선균의 연기도 안정적이다. 이선균과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우리 선희’(2013)에 이어 10년 만의 재회다. “홍상수 감독님 작품에선 같이 연기하는 신은 많지 않았지만, 대사량이 워낙 많아서 밀도가 어마어마했어요. 그때 훈련이 됐는지 10년 만에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더라고요.”
여러 장르를 섞어놓은 탓에 공포영화 마니아들에겐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3장 구성으로 장이 넘어갈 때마다 과감하게 이야기를 생략하면서 감정의 진폭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한계도 보인다.모호한 결말도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결말은 남편 몸에 들어온 무언가를 쫓으려던 아내의 성공으로도, 미쳐버린 아내를 진정시키려는 남편의 성공으로도 읽힌다. 유재선 감독은 “봉준호 감독님이 엔딩에 대한 감독의 해석을 누설하지 말라는 팁을 주셨다. 극장을 나서면서 서로 어떻게 해석했는지 대화가 활발히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부 장면은 잔인한 장면을 싫어하는 관객들에겐 불쾌할 수 있다. 다음 달 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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