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할수록 멀어지는 잠… 불면증, 몸의 리듬에 맡기자
밑져야 본전이니 잠 포기하고 못했던 취미 생활 즐겨보길
못 자도 피로도 확 줄어든다
20여 년간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동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 모 씨가 사석에서 던진 말이었다. 그는 매일 밤 잠을 자야 된다는 강박과 불안에 휩싸였다. 불안이 심할수록 잠을 자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반복됐다. 붙잡으려 할수록 더 달아나려는 일방적인 짝사랑의 대상처럼 노력할수록 잠은 더 달아나고 정신은 또렷해졌다. 이렇게 되면 매우 좌절스럽고 다시 불안해지면서 ‘불안-노력-각성-좌절-다시 불안’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많은 만성불면증 환자는 이 씨처럼 ‘잠이 안 오니까 잠을 청한다’라고 말한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됐을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잠은 자려고 노력할수록 깨게 돼 있다. 잠을 청하는 강도에 비례해서 정신은 말똥해진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단순하다. 바로, 철저하게 몸의 리듬에 맡기는 것이다. 몸의 리듬에 맡긴다는 것은 졸리면 눕고, 깨면 깨끗이 포기하고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졸리면 침실로 들어가 눕고, 졸리지 않으면 극단적인 경우 밤을 샐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치료의 핵심은 자는 시간을 늘리는 데 있지 않고 몇 시간을 자든 다음 날 일상생활의 불편감을 최대한 줄이는 데 있다. 다만 불면증 외에 심한 스트레스 요인이나 우울증, 불안장애나 공황장애, 각종 통증 질환이나 신체적 불편함 등 분명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 경우는 여기에 대한 치료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까무룩 하게 20∼30분 정도의 짧은 낮잠에 빠져들었던 어느 오후를 생각해보라. 그 정도 짧은 수면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4, 5시간 최상의 상태로 지낼 수 있었던 시간에 대한 기억을 누구나 한 번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젊은 시절 친한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새벽녘까지 수다를 떨면서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고 깼을 때의 하루는 어떠했던가. 노곤하고 졸리긴 했겠지만 무엇인가를 빼앗기듯 억울한 느낌의 극심한 피로감은 거의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와 밤새 자려고 애쓰며 뒤척인 경우 사이에 수면 시간의 차이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낮 동안의 피로도와 관련된 상태에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잠을 자려는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가에 있다. 잠을 자려는 노력을 하는 것에 비례해서 낮 동안의 불쾌감은 커지게 돼 있다.
누워서 잠을 청하는 상태는 오지 않는,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하염없이 일방적으로 기다리는 상태와 같다. 그것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또 있을까. 상대에 대한 거의 스토킹 수준에 가깝다. 내가 그토록 원하는 그 대상이 도적처럼 언제 왔다 갈지 알 수 없다는 불안과 갈망은 결코 누워서도 잠들 수 없는 상태를 만든다. 매일 밤, 눈만 감고 가만히 누워서 잠을 생각하며 자려고 노력하는 상태는 엄청난 에너지의 소진을 가져온다. 다음 날 힘들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불면증 환자들이 낮 동안에 극심하게 피로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수면 시간이 줄어서라기보다는 반복되는 밤 동안의 갈망과 그로 인한 에너지 소진이 원인이다.
따라서 만성불면증 환자 치료의 목표는 잠 시간을 늘리거나 채우는 것보다 낮 동안의 짜증스럽고 불쾌한 심신의 힘든 느낌을 줄이는 것이 돼야 한다. 일단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단 2, 3일 만이라도 잠을 깨끗이 포기한다고 생각하고, 자기 글렀다고 생각되면 훌훌 털고 잠자리에서 벗어나 보자. 차라리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고 누워서 오매불망 잠을 갈망하던 시간에 못했던 것들을 해보라. 시도해 보기 전엔 내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겠지만 잠에 대한 갈망이 줄어드는 만큼 잠을 자는 시간과는 상관없이 분명히 짜증스러움이 극적으로 줄어드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철저하게 몸의 리듬에 맡겨서 거의 밤을 새우게 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최소한 당신이 잠을 생각하느라 뒤척이며 하룻밤을 보낸 것보다는 훨씬 덜 피곤할 것이다.
수면제를 복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면제 의존이나 중독에 대한 일각의 염려는 과도한 면이 있다. 반대로 수면제를 통해 억지로 수면 시간을 늘려 채우고 통제하려는 시도 역시 자연스러운 수면-각성 리듬을 방해할 수 있다. 수면제는 적절히 사용하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불면증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약은 아니다. 잠에 대한 태도나 생각에 변화가 생기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동료 이 씨가 그토록 심한 불면증에서 벗어나던 첫 신호탄이 바로 이 생각의 변화였다. 내 권유대로 잠에 대한 생각을 줄이고, 그 시간에 그간 바빠서 못했던 취미를 즐기거나 읽고 싶었던 책을 읽기도 하면서 잠이라는 짝사랑의 대상에 대해 무심한 태도가 늘었다. 그러면서 그는 잠 시간이 갑자기 길어지지는 않았지만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고통스러운 느낌은 훨씬 줄었다. 이것만 꼭 기억하자. 수면 시간이 늘지 않아도 당신의 몸이 무척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을.
강은호 뉴욕정신건강의학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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