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얼음에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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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울음이 따갑다.
얼음을 입 안에 넣어 천천히 녹여 먹기도 하고 물을 부어 찬물을 만들어 먹으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내게는 두 잔의 의미이다.
듬뿍 넣은 꿀과 동동 뜬 얼음이 더 맛있던 미숫가루는 엄마와 함께 내 곁을 떠난 지 몇 해이다.
"팥빙수 두 그릇 주세요" "팥빙수? 팥을 넣은 얼음물이가?" "아니, 팥빙설을 서울에선 팥빙수라고 해" "이게 왜 팥빙수고? 누가 봐도 물이 아니라 눈이구먼" "팥빙수가 더 미래지향적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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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울음이 따갑다. 말복도 지났는데 아직 여름이다. 폭우와 태풍이 지난 자리에는 폭염이 밀려왔다. 이제 그 열기도 막바지이다.
여름이 늘 그랬지만 이번 여름은 특히 얼음에 기대어 살았다. 사무실 내 책상 위에는 오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다. ‘얼죽아’는 아닌데 이번 여름은 유독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고 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 들이켜고 나면 얼음이 가득 남는다. 얼음을 입 안에 넣어 천천히 녹여 먹기도 하고 물을 부어 찬물을 만들어 먹으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내게는 두 잔의 의미이다.
점심으로 살얼음이 낀 냉면이나 밀면을 즐겨 먹는다. 살얼음은 목구멍을 타고 위장까지 온몸을 구석구석 시원하게 만든다. 어릴 적 즐겨 먹던 색소를 뿌린 슬러시 같은 국물이 여름을 녹인다.
이맘때면 엄마의 미숫가루가 그리워진다. 말린 쑥과 달달 볶은 콩을 곱게 갈아 만든 미숫가루. 듬뿍 넣은 꿀과 동동 뜬 얼음이 더 맛있던 미숫가루는 엄마와 함께 내 곁을 떠난 지 몇 해이다.
“팥빙수 두 그릇 주세요” “팥빙수? 팥을 넣은 얼음물이가?” “아니, 팥빙설을 서울에선 팥빙수라고 해” “이게 왜 팥빙수고? 누가 봐도 물이 아니라 눈이구먼” “팥빙수가 더 미래지향적이잖아”. 40여 년 전 서울 대학로 제과점에서 나눈 대화이다. 지금은 팥빙수로 통일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대구에서는 팥빙설이라 했다. 얼음이 갈아져서 눈이 되고 또 녹아 물이 되는 이치는 당연한데 우리는 현실중심적이냐, 미래지향적이냐를 두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도 팥빙수를 먹을 때면 나는 그때의 추억도 함께 먹는다. 다만 미래지향적이 아니라 여전히 현실중심적이다. 물이 되기 전에 보드라운 눈의 차가움을 만끽한다. 예전에는 팥빙수를 많이 만들어 먹었다. 기계에 얼음을 갈고 푹 삶은 팥과 과일, 떡 조각을 얹고 연유를 뿌려 먹던 팥빙수. 요즘은 망고빙수 딸기빙수 눈꽃빙수 떡빙수 등 다양한 이름만큼 다채로운 맛을 남의 손을 빌려 즐기고 있다.
얼음에 기대어 사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코끼리에게 얼음 간식이 제공되고 호랑이와 사자에게도 고기얼음과자가 제공되었다 한다. 판다는 얼음 베개를 베고 낮잠을 자고 자갈치시장 생선들에게도 올여름 얼음이 많이 필요했다고 한다.
지금은 언제 어디서든 얼음을 구할 수 있다. 냉장고와 정수기에서도 버튼만 누르면 얼음이 나오고 마트에서도 각얼음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냉장고가 없던 시대, 우리 조상들은 얼음을 어떻게 구했을까? ‘삼국지위지동이전’의 부여 편에는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지낸다’고 했고,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도 신라의 얼음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얼음저장소인 석빙고는 모두 조선시대 축조한 것이라 한다. 얼음을 관장하는 직책도 있었다 하니 우리 조상들이 얼음을 얼마나 귀히 여겼는지 짐작이 간다. 석빙고는 과학적으로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한 우리의 보물이다.
얼음을 많이 소비한 탓일까? 빙하가 녹고 있다. 지구는 온난화 시대를 넘어 열대화 시대로 가는 중이다. 미국 알래스카의 빙하가 붕괴하여 홍수가 나고, 스위스 테오둘 빙하가 녹아서 실종된 독일 등반가의 등산화가 37년 만에 발견되기도 했다. 더위로 인해 얼음을 만들기 위해 전원을 사용하고 그로 인해 지구가 더 더워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이미 녹은 빙하가 탁한 피로 엉기어/적도까지 내려와 신음으로 굳어버린,//캄캄한 궤도 밖으로/곧 실려 나갈/푸른 별’ (서숙희 시조 ‘지구는 지금’ 셋째 수)
지구가 상당히 더워져서 석빙고가 제 기능을 발휘할지는 의문이지만 겨울의 얼음을 보관했다가 여름에 먹을 수 있는 석빙고 같은 자연적인 것은 없을까? 빙하가 다 녹아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얼음 없는 세상에서 나는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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