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봉 마주한 고산마을…자본주의와 맞바꾼 인간애 오롯이
- 눈 뒤덮인 해발 7134m 산 아래
- 키르기스스탄 최남단 ‘사리모골’
- 유목민 삶·문화 잘 보존돼 있어
- 이곳선 자녀가 행복과 부의 상징
- 초중고 학생 수만 1500명 달해
- 한국인이 상수도 시설 설치 도와
- ‘꼬레아’란 이름만으로도 큰 환대
- 해발 3500m 위치한 ‘툴파르콜’
- 낙원에 펼쳐진 40개 호수 장관
키르기스스탄의 도로에는 터널이 거의 없다. 대부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나라인데도 네 다섯 개의 터널이 전부란다. 그러니 다른 도시나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산허리를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고 내려오기를 반복해야 한다. 오시를 출발해 고산마을인 ‘사리모골’(Sary-Mogol 또는 Sary-Mogul)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는 ‘바쁠수록 둘러가라’는 말을 저절로 실천할 수 있다.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둘러 가다 보면 산 중턱도 보이고 정상도 보이고 내려가는 길도 보인다. 아래에서 보던 것을 위에서 보게 되고 가까이에서 보던 것을 멀리서도 본다. 달라진 시선을 통해 바깥의 세상이 천천히 내 안의 사유와 만난다. 글로써 다 담을 수 없는 키르기스스탄 여행의 깊이가 여기에 있다.
오시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굴차’라는 산골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작은 마을을 지나 다시 산으로 오르면 마을은 완전히 사라진다. 사람이 사라진 그곳은 여름 한 철 자유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과 소와 양 떼의 세상이 된다. 여름철 가축들을 이끌고 유목 생활을 하기 위한 ‘유르트’만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유르트는 이동이 쉬우면서도 방수와 보온과 채광까지도 신경 써 만든 이곳 유목민들의 전통가옥이다. 동쪽의 거대 산맥인 텐샨과 남쪽의 파미르를 연결하듯 이어져 있는 ‘알라이 계곡’(Alay Valley)을 따라 굽이굽이 오르면 약 해발 3500m가 넘는 산 정상에 도달한다. 그러면 길은 다시 아래로 이어지고 산세는 어느덧 초록에서 황토색의 돌산과 민둥산으로 바뀐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더 달리면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가운데 해발 3000m의 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파미르고원이다. 오시에서 대여섯 시간 걸리는 이곳까지 하루에 한 번 작은 버스가 다닌다. 해발 1000m에서 3000m 사이를 매일 오르내리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동이 일 년 내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긴 겨울 동안 녹지 않고 쌓이는 눈은 사람들의 발길을 가로막는다. 이곳의 겨울은 유달리 길어서 9월 말이면 시작돼 5월이 되어야 거의 끝난다. 그러기에 짧은 봄과 여름은 부활 그 자체다.
한여름에도 눈으로 덮여 있는 레닌봉을 마주한 채 산 아래 제법 큰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사리모골이다. 사리모골은 타지키스탄과의 국경과 접한 키르기스스탄의 최남단이자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 중 하나다. 레닌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레닌봉은 파미르 산맥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면서도 해발 7134m라는 높이와 비교하면 전문 산악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오르기 쉽다는 평을 받는다. 세상과 동떨어진 고산마을이 의외로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과 트레킹족으로 붐비는 이유다. 레닌봉은 구소련 시대의 이름으로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공식적인 이름은 ‘코히가르모’(Koh-i-Garmo) 즉 ‘따뜻한 산’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레닌봉으로 통한다.
사리모골은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키르기스스탄 유목민의 문화가 가장 잘 보존돼 있기에 유목민들의 생활과 정서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맞교환한 인간애와 순수함이 여전히 느릿느릿함 속에서 순수하게 살아남은 곳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서는 저절로 겸손해진다. 인간이기에 대단한 것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고도’라는 것부터 인간을 장악한다. 조금씩 고도를 높여 도착했지만 낮은 지대에 살던 사람에게 해발 3000m는 호흡부터 표가 난다. 천천히 걷거나 작은 행동을 할 때는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다가도 조금 과격한 움직임을 하거나 심지어 화를 내거나 말만 많이 해도 즉시 호흡이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자연적으로 도인이 된다.
설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공기에도 한낮의 태양에 화상을 입기 쉽다. 그래서 이곳의 높은 기온과 건조한 기후에는 한여름에도 온몸을 감싸는 의복이 옳다. 종교적 이유도 있겠지만 이런 기후적 환경으로 인해 여성은 대부분 긴 옷에 천으로 머리를 감싸고 남성은 가운데가 높아 열이 바로 머리로 흡수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특별한 모자를 쓴다. ‘아크 칼팍’이라 부르는 전통 모자는 눈 덮인 산봉우리를 닮았다. 네 개의 면으로 접기에 유용하고 펼쳐 머리에 쓰면 어떤 두상에나 잘 맞다. 각각의 네 면은 공기 물 불 땅의 4 원소를 의미하고, 각각의 면에 그려져 있는 4개의 테두리 선은 생명을 상징하며, 상단에 달린 술은 조상의 후손임과 기억을 상징한다고 한다. 모자 하나에서 이곳 사람들의 자연과 사람에 대한 깊은 철학을 느낄 수 있다.
사리모골 마을 가운데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학교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초중고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있는데, 이곳의 학생 수가 대략 1500명이나 된다고 한다. 한 가정의 평균 자녀 수가 3~5명으로, 이곳에서는 자녀를 많이 두는 것이 행복의 상징이기도 하고 유목과 농업을 위해서는 힘이자 재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곳 사람들은 아이들을 좋아한다. 마을 어디에서나 아이들이 어울려 노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지나가는 외국인을 향해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외딴 고산마을이 소멸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마을에 몇 년 전까지도 상수도 시설이 없었다.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물을 길어다가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오염이 없는 곳이라지만 안전할 수만은 없었다. 방목한 가축들이 계곡 근처에서 대소변을 볼 수도 있는 여름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곳 정부는 이런 외진 마을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이곳에 상수도 시설을 설치하도록 도운 한국 사람들이 있다. 연구자료 수집을 위해 잠시 이곳에 머물던 중앙아시아 연구자인 공원국과 윤성제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국내 지인 및 여러 단체의 기부금과 한 지방단체의 해외 원조비 등을 받아 시급한 두 지역의 상수도사업을 현실화했다. 한국 사람들의 기부금으로 자재를 사들인 후 주민이 직접 땅을 파고 정수시설을 설치한 후 시멘트와 벽돌을 쌓아 시설을 완성했다.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서로를 위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들의 공동작업이었던 셈이다. 2021년 여름의 일이다. 이로 인해 집집마다 수도꼭지가 달렸고 아침저녁 양동이에 물을 길어 날라야 했던 여성의 노동도 감소했다. 마을 상류에 있는 정수 시설장은 이곳 남성들이 공동 관리한다. 사리모골에서 ‘꼬레아’라는 이름만으로도 큰 환대를 받는 이유다.
사리모골을 등 뒤로 한 채 자동차로 한 시간가량 넓은 평원과 언덕을 넘어 눈 덮인 산봉우리를 달린다. 그러면 끝없이 펼쳐져 있던 메마른 땅이 어느새 초록 언덕으로 바뀌고 설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질 때쯤 언덕 사이 사이로 작은 호수들이 나타난다.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마흔 개가 넘는다. 해발 3500m 지점에 아름다운 낙원처럼 감춰진 있는 이곳은 툴파르콜(Tulpar-kol)이다. 키르기스인들의 환대는 ‘살라마트시스브’(축약해서 살람)라는 인사말과 함께 ‘차’를 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룻밤 묵을 유르트의 주인장이 권하는 따뜻한 차를 마신 후 다시 길을 나섰다. 3900m 지점에 있는 베이스캠프까지 갔다 오기 위해서다. 숫자상 멀지 않아 보이지만 걸으면 대략 왕복으로 한나절이 걸린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호흡이 가빠 빨리 걸을 수 없고 길도 가파르기 때문이다. 호흡을 조절하며 오른 그곳의 세상은 달라져 있다. 눈앞에서는 레닌봉의 설산이 눈부시게 장엄한 자태로 서 있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계곡에서는 산 위의 눈이 녹으면서 만들어졌을 엄청난 양의 물이 무서울 정도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흘러간다. 이 모든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록 언덕 위에서는 온갖 색깔의 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문득 라이너 쿤체의 시구가 떠오른다.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올라갔던 길을 다시 내려오니 유르트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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