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희의동행] 시절 인연

2023. 8. 23.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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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메인보드가 나가면서 그 안에 들어 있던 모든 자료와 연락처들이 사라져 버렸다.

내가 이 지상에서 사라졌을 때 주인을 잃은 그것들은 유령처럼 떠돌 텐데, 그것도 마뜩잖을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런저런 일로 얽힌 연락처가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고 해서 애석하고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라고 나를 다독인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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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메인보드가 나가면서 그 안에 들어 있던 모든 자료와 연락처들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저런 일로 얽힌 인연들이 일시에 소거돼 버린 것이다. 내 과거와 흔적들이 이렇듯 강제적으로 사라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한번은 싸이월드 속의 자료들을 잃었고, 두 번째는 랜섬웨어에 걸려 파일 전부를 잃었고, 이번이 세 번째였다.

싸이월드는 다시 기사회생하긴 했지만 예전 그대로의 것이 아니었다. 기실 그 싸이월드는 내 모든 생명활동의 기록저장소였다. 일상의 소소한 기척과 흔적들은 물론 가족과 온갖 풍경들까지, 시시콜콜 찍어 항목별로 분류해 남겨 두었었다. 싸이월드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이야기들이 풍문처럼 나돌 때 그 자료들을 다운로드할 기회가 있었지만 양이 워낙 많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수십 년의 기록들이 켜켜이 쟁여져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먹고 다운로드하려면 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 여겼다. 내가 이 지상에서 사라졌을 때 주인을 잃은 그것들은 유령처럼 떠돌 텐데, 그것도 마뜩잖을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 지난 시간들의 흔적은 사라졌다.

한데 얼마 가지 않아 내 결단과 행동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결코 내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의 삶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들이 응집되고 응결돼 이뤄진 것인데 그 바탕이 사라졌으니, 현재의 나는 뿌리 없는 너겁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나를 증거하고, 대변하고, 확인시켜 줄 어떠한 자료도 없으니 지금의 내가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두 번째는 랜섬웨어에 걸려 모든 자료들이 사라져 버린 일이다. 그간의 한숨과 감탄과 고뇌의 흔적들이 알 수 없는 기호들로 변환돼 저장돼 있는 것을 목도했을 때, 그간의 수고가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는 황망함과 함께 내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스마트폰의 메인보드가 나가면서 모든 연락처가 사라져 버린 일이다.

그 세 번의 말소에 따른 충격과 감정은 각기 다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내가 지워진 것이라면, 세 번째는 나와 연결된 타인이 사라진 것이다. 시절 인연. 그때 떠오른 단어가 그것이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시절 인연일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기억으로 각기 다른 모습의 나를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는 애틋한 마음으로, 누군가는 좀 고약한 마음으로. 어떤 모습이든 괜찮다. 그게 나일 터이므로.

기실 그동안 나는 조금씩 조금씩 주변 정리를 해왔다. 안 입는 옷가지들을 버리고, 책들을 정리하고, 그리고 말도 줄였다. 앞으로 내게 남은 세월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니 이런저런 일로 얽힌 연락처가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고 해서 애석하고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라고 나를 다독인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좋을 일이다. 지금, 내 생이 지나온 그 어느 시절보다도 가볍다.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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