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신광영]칵테일 홀짝이던 사람들 뒤로 산불이 다가왔다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땅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는 것 같았다”고 한 생존자는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사람들은 차에서 뛰쳐나와 바다를 향해 내달렸다. 노약자들은 차에서 잠시 망설이는 사이 불길에 갇혔다. 반려동물과 함께 해변에 닿은 사람들은 물속에까지 동물들을 데려갈 수 없어 그냥 놔줬다. 어리둥절해하던 강아지들은 주인을 따라 바닷물로 몸을 던졌다.
물도 피난처가 되진 못했다. 하늘에서 축구공만 한 불씨와 불타는 파편들이 떨어졌다. 머리를 물속에 담갔다 다시 들기를 반복했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면 짙게 내려앉은 연기가 숨통을 조여 왔다. 질식과 저체온증으로 사람들은 기력을 잃어갔다. 강풍은 널빤지나 나뭇조각에 의지해 겨우 떠 있던 이들을 먼바다로 밀어냈다.
하와이 산불 2주째인 22일 현재, 실종자는 850여 명에 달한다. 확인된 사망자는 114명. 이 중 27명만 신원이 확인됐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시신이 훨씬 많고, 발견되더라도 신원 확인이 어렵다는 얘기다.
지금 하와이에는 9·11테러 현장에서 유해를 수습했던 퇴역 군인들이 활동 중이다. 러시아의 폭격에 희생된 우크라이나인들의 시신을 조사한 법의학자들도 투입됐다. 고고학자들도 참여해 잿더미에서 사람 뼛조각을 찾고 있다. 건물이나 차량 잔해를 채로 걸러서 그 안에 사람이 있었는지를 식별한다. 화재 당시 집이나 호텔, 차에 있었던 가족이 실종됐다는 신고가 쏟아지지만 흔적조차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테러 못지않은 이 참사가 ‘기후의 역습’이라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의 이견이 없다. 지구온난화로 공기가 뜨거워지면 식물은 급격히 건조해지고, 땅에서 증발한 수분을 듬뿍 빨아들인 태풍은 더욱 강력해진다. 그 결과 더 쉽게 불붙고, 더 빠르게 확산된다. 하와이는 지구온난화가 가장 빠른 지역 중 하나다. 산업화를 거치며 지구 온도가 1.1도 오를 때 하와이는 2도 상승했다.
이번 산불은 태풍에 전신주 전선이 흘러내렸고, 바싹 마른 풀과 마찰하며 불이 붙어 강풍을 타고 퍼져 나갔다는 분석이 많다. 최근 10년 새 하와이에선 비슷한 패턴의 산불이 자주 났다. 이번 역시 어느 정도 예상된 산불이었다. 하지만 불이 산만 태우지 않고 섬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것이란 상상은 하지 않았다.
지난해 하와이의 9∼18세 청소년 14명은 “산불과 폭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며 주(州)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주 정부가 고속도로 개발을 촉진하는 등 화석연료 사용을 부추기고 있으니 막아 달라는 호소였다. 미국 전역에서 청소년들의 이 같은 기후위기 소송이 여러 번 제기됐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로 치부돼 기각되기 일쑤였지만 이젠 법원도 달라지고 있다. 하와이주 법원은 올 4월 “기후변화가 미래 세대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어 이에 대비하는 것은 주 정부의 헌법적 책무”라며 정식 재판에 회부했다. 몬태나주 법원 역시 14일 “석탄·석유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량 조사를 면제해 준 주 정책은 위헌”이라며 청소년들의 손을 들어줬다.
하와이 소송에 동참한 칼리코 테루야(13)는 이번 산불로 집이 모두 탔다. 불이 날 당시 훌라(하와이 전통 춤) 수업을 받던 중이어서 목숨을 건졌다. “어른들은 얼마나 더 큰 비극을 겪어야 저희처럼 절박해질까요”라고 테루야는 NYT에 말했다. 그동안 많은 기후재난이 그랬듯 이번 하와이 산불도 곧 기억에서 무뎌져 갈 것이다. 하지만 등 뒤에서 불기둥이 다가오는 걸 모른 채 칵테일을 홀짝이는 사람이 바로 우리였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쯤 해 볼 필요가 있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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