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여러 감정 만나듯, 자신의 마음 읽는 소설되길 바라”
중·단편 7편 엮어 5년 만에 출간
다양한 관계의 모습 섬세히 포착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어리석음·나쁜 면 등을 쓰는 것이
용기 있고 진실한 글쓰기 아닐까
…이상하게도, 대학에 다닐 때 큰 자극을 받고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강의 대부분은 젊은 여자 강사가 했던 수업들이었어.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기와 전화 통화를 했다. …맞아, 우리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강사가 애정을 갖고 자신이 공부한 것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랬던 것 같아.
공부하기 위해서 대학원에 왔다가 상처받은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연구자들의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받는 곳도 아니었고, 대학 사회 바깥보다 더 보수적인 면도 적지 않았다. 만약에 공부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학생을 만난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공부는 대학원에 가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마침 용산참사도 십주 년이 다 돼 가던 때였다. 충격적인 참사였지만,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얼마 전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과 ‘공동정범’을 보고 가슴이 아팠던 그는 용산에 대한 생각도 담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33쪽)
사람 간의 관계 문제를 그리는 데 특출한 감각을 발휘해온 작가 최은영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비롯해 각종 잡지에 발표했던 중·단편 7편을 엮은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문학동네)를 들고 돌아왔다. 5년 만의 소설집 출간이다.
소설집 작품들은 독자들을 사회적 맥락을 가진 다양한 관계 속으로 이끈다. 비정규직 문제 속에서 동갑내기 인턴 다희와 카풀을 하면서 전혀 다른 대화를 하는 지수의 관계를 다룬 ‘일 년’, 엄마가 집을 나간 뒤 부모 역할을 해온 언니와 그 언니가 무시당하는 현실과 맞서려는 ‘나’의 모습을 그린 ‘답신’, 텃밭을 배경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보살펴준 오빠와, 오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여동생 이야기를 담은 ‘파종’….
“저는 용기 있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제 마음만큼 용기 있게 쓰지는 못했다. 사회를 비판하거나 부정의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에 두려움은 없다. 하지만 제 자신의 어리석음 같은 것을 쓰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가 필요한 부분 같다. 남들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 어두운 부분, 후지고 못난 모습, 나쁜 면을 보여주는 게 더 용기 있고 진실한 글쓰기다.”
작품 ‘몫’은 도서관 앞에 쌓인 교지를 우연히 집어들었다가 선배 정윤의 글에 마음을 빼앗긴 스무 살 해진이 교지 편집부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해진은 날카로운 글을 쓰는 동기 희영에 압도되고, 여성문제를 둘러싸고 갈등과 논쟁이 첨예해지면서 해진과 희영, 선배 정윤 사이에 점점 틈이 만들어진다.
―이 작품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대학교에 다닐 때 교지 편집을 하면서 친구들과 책을 읽고 의견을 말하고 글쓰기를 배웠다. 소중한 경험이자 기억이었다. 그때 기지촌 여성 문제를 비롯해 한국 여성인권 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미군에 의해 피살된 윤금이씨 사건 당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고 사건을 이용했는지 알게 됐다. 고려대생이 이화여대에 가서 여대생들을 폭행했다는 대자보를 보고서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 기억들을 더해 쓴 것 같다.”
소설집을 닫는 ‘사라지는 또 사라지지 않는’은 식모 출신의 육십 대 여성 기남의 시각으로 복잡하면서 어려운 모녀 관계를 긴 호흡으로 풀어간 작품이다. 기남은 홍콩에 사는 둘째딸 우경과 손자 마이클과 함께 시내에 구경 갔다가 실수를 저지르고, 집에 돌아와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일곱 살 손자 마이클이 부끄러워도 된다고 위로하자, 기남은 비로소 어떤 ‘따뜻한 통증’을 느낀다.
―사라지는 것은 무엇이고,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쓴 것이어서 그 기간 저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소설 같다. 지금까지 달려왔구나. 열심히 하려고 했던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집 같다. 우리는 살면서 슬픔이라든지 두려움이라든지 미움이라든지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만난다. 마지막 단편에서 마이클이 부끄러워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되는구나, 하고 자신의 마음을 읽고 바라볼 수 있는 소설이 됐으면 좋겠다.”
1984년 광명에서 교사인 아버지와 직장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최은영은 습작을 거듭한 끝에 2013년 ‘쇼코의 미소’로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장편소설 ‘밝은 밤’ 등을 펴냈다.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허균문학작가상, 김준성문학상, 이해조소설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한국일보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낮 최고 기온이 섭씨 34도가 넘던 그날, 최은영은 처음 얼마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는데도. 아마 코로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문 두 개를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마스크를 편하게 벗을 수 있도록.
기자의 소설 이야기는 이날 이상하게도 정돈되지 못하고 주저리주저리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인내심을 갖고 들어준 뒤 자신의 마음을, 부끄러울 수도 있는 진심을 솔직하게 들려줬다.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다가 그의 어떤 마음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날 마음이 어떤 마음에 천천히 가닿고 있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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