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기 칼럼] 한경협 됐다고 정경유착 사라질까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기업 반열에 오르는 것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과 몇몇 기업인이 1961년 설립했는데, 박정희 정부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당시 10개 남짓이었던 전경련 회원사는 2016년 600개를 웃돌 정도로 팽창했다.
전경련이 22일 임시총회를 열고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이름을 바꿨다. 새 회장을 선임하면서 윤리헌장도 발표했다. 전경련 산하 연구기관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을 한경협이 흡수 통합해 글로벌 싱크탱크형 경제단체로 탈바꿈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전경련에는 주로 대기업 회원사를 대상으로 돈을 모금하는 창구 역할을 했던 어두운 과거가 있다. 과거 군사정권의 돈줄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기업들은 돈을 주고 특혜를 샀다. 결국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 때 실체가 여실히 드러났다. 정경유착의 고리이자 헌법질서를 유린한 범죄집단이었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2017년 삼성과 현대, SK, LG 등 4대 그룹 계열사들은 전경련에서 탈퇴했다. 하지만 한경연 회원자격은 그대로여서 이번에 한경연과 통합한 한경협의 회원사로 재가입한 셈이 됐다.
한경협을 이끌게 된 류진 풍산그룹 회장이 이날 취임 일성으로 “어두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그간의 잘못된 고리를 끊겠다”고 밝힌 것은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 보인다. 윤리헌장에는 정치·행정권력 등의 부당한 압력 단호히 배격,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확산에 진력, 혁신 주도 경제 및 일자리 창출 선도 등을 담았다.
정부와 기업이 협업을 통해 시너지를 내고 국민경제에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협력을 넘어 유착 단계로 넘어가면 곤란하다. 기업은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부를 움직여 국민경제에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유착은 부정부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의 대기업집단은 상속과 경영권 승계라는 난제를 안고 있어 정권의 도움이 절실하다.
한경협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에도 꺼지지 않는 정경유착 불씨는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을 맡았던 ‘정치인’ 김병준이다. 한경협에서는 고문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류 회장은 기자들에게 “(김 전 대행은) 아이디어도 많고 해서 존경한다. 고문으로 모시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행은 지난 20대 대선 때 윤석열 후보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선대위원장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을 지냈다. 윤 대통령 측근인 김 전 대행이 한경협에 남아 있는 한 정경유착 시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경협 상근부회장에도 경제 비전문가가 내정됐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의전비서관을 지낸 외교관 출신 김창범 전 인도네시아 대사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전경련과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가 추진 중인 ‘한·일 미래파트너십 기금’이 정치권 연루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3월 강제동원 피해에 대해 일본 전범기업을 제외하고 한국 기업이 모금한 재단을 통한 제3자 배상 방식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전경련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게이단렌과 각각 10억원씩 출연해 20억원 규모의 미래파트너십 기금을 조성하기로 한 것이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5월 정상회담 이후 수차례 미래파트너십 기금에 대해 언급했다. 시민사회단체에선 미래파트너십 기금이 강제동원 해결에 쓰이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7년 전 탈퇴했던 대기업들을 굳이 끌어들인 속내도 의심스럽다. 김 전 대행은 4대 그룹에 한경협 참여를 직접 요청했다. 4대 그룹으로선 윤 대통령 핵심 측근의 가입 요청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응한 셈이다. 2016년 전경련 회비 수입 408억원 중 4대 그룹 계열사가 낸 비중은 70%가량이었다고 한다. 7년 새 회원사는 170개가량 줄어든 450개, 회비 수입은 4분의 1 수준인 101억원에 그쳤다. 4대 그룹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자금을 빨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전경련은 상속·법인세율 인하, 노동시간 연장, 중대재해처벌법 경영자 처벌 완화, 기업 총수 의결권을 보호하는 복수의결권 도입 등을 꾸준히 주장해왔다. 싱크탱크로 변신하겠다고 다짐하는 단체가 부자들만 잘살 수 있는 논리만 늘어놓는 게 부끄럽지 않은가. 중죄를 저질러 수감됐다가 출소한 뒤 이름을 바꾸는 사례가 간혹 있다고 한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는 없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haho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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