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 ‘이기주의’로 변질된 인권
누구나 ‘권리’를 주장하지만, 아무도 ‘의무’는 얘기하지 않는다. 최근 일련의 사건으로 불거진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사회적 병리 현상은 아무래도 이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권리를 주장한다.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 좋은 일자리를 가질 권리,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 여름에는 더위를 피할 권리,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권리, 일하면서도 적절하게 쉴 권리.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욕구가 마땅히 요구할 권리로 전환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마땅히 가지는 권리가 보편화된 ‘인권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가 조금이라도 침해되었다고 느끼면 어김없이 ‘인권’을 내세우며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
우리는 정말 ‘인권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최근 서로 연결된 두 사건을 바라보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유명 웹툰 작가가 자신의 자폐 성향 아들이 초등학교 특수교사로부터 아동학대를 당했다고 고발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 서이초등학교에서 젊은 여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사건이다. 이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한 데는 학폭 관련 업무를 담당하면서 해당 학부모에게 지속적으로 시달린 것이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 두 사건을 연결하는 것은 바로 ‘학부모의 악성 민원’이다.
자기 자식의 권리와 복지만을 중시하는 ‘내 새끼 제일주의’가 이미 오래전부터 교권을 침식해 교실을 통제할 수 없는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음에도, 우리는 이러한 징후를 교육의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애써 외면했던 것은 아닌가?
일부 학생과 학부모들에 의한 교권 침해가 ‘교실 붕괴’를 넘어 교사의 인격을 모독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야 교사들이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입에 올리고, 교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인간 존엄’을 얘기하지만, 그 목소리는 여전히 소리 없는 절규에 가깝다. 교사들은 왜 이제까지 자신의 ‘권리’ 주장을 조심스러워했던 것인가? 우리 사회는 왜 교권이 땅바닥에 떨어져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인가? 교권을 회복하려면 학생의 인권에 대항할 수 있는 교사의 권리를 강화해야 하는가?
익명의 권력집단 된 학부모
이러한 질문은 자칫 권리 대 권리의 충돌을 초래할 수 있다. 인권은 본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권리인 까닭에 어느 집단의 권리를 강화한다고 해서 다른 집단의 권리가 약화하는 ‘제로섬 게임’을 불러오지 않는다. 2010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각 시·도 교육청별로 도입한 ‘학생인권조례’는 결코 교권 침해의 원흉이 아니다. 학생인권조례를 수정하거나 축소한다고 해서 교권이 확립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교육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인권’이 학생과 교사에게 모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권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두 사건은 우리가 그동안 ‘권리’와 ‘인권’과 ‘인간 존엄’을 잘못 이해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의무가 없는 권리의 절대화는 권리를 이기적인 ‘권력 수단’으로 변질시킨다. 왜 학부모는 교사에게 개인 휴대폰으로 수십 통씩 전화를 걸어 괴롭히고, 오만무례한 악성 갑질로 인격을 모독하는가? 왜 학부모는 아동학대로 의심되는 행위에 대해 상담과 대화 대신에 녹음기를 동원해 증거를 모으고 고발하는가?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징후의 의미는 간단하다. ‘신뢰의 부재’다.
학부모는 교사를 믿지 않고, 교사는 학부모를 잠재적 고발자로 두려워한다. 신뢰가 없는 곳은 각자도생의 권력의 장이다. 힘이 세고 목소리가 큰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권력을 가진 자가 ‘권리’를 주장한다. 학부모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내세우면서 교사에게 압박을 가한다. 이렇게 학부모는 교사에게 갑질을 하는 익명의 권력 집단이 된다. 물론 이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학부모는 소수이고 학부모 대부분은 교사를 존중하지만, 학부모 자체가 교사들에게 위협의 대상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자기 새끼만을 제일로 생각하는 익명의 권력 집단이 된 것이다.
권리가 권력의 수단이 될 때 권리는 왜곡된다. 모두 인권을 이야기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할 위험이 있다.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원하지만 “모든 사람”은 점점 더 좁은 집단으로 축소된다. 학부모에게 인권은 자기 자식이 차별 받지 않고 교육받을 권리로 이해된다. 설령 다른 학생에게 해를 끼쳐 타이를 때에도, 너무 강압적으로 훈육해선 안 된다고 주장할 때도 학생의 인권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고 개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인격은 존중하지 않는다. 인권은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집단에만 국한되고,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제된다. 인권의 보편성은 이렇게 무시된다.
왜 사람들은 내 새끼가 귀하면 다른 사람의 자식도 귀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권리는 이제 특정 집단의 이기적인 특권이 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 헌법은 제10조에서 인권과 인간 존엄의 보편성을 얘기한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인권은 결코 교사와 학생, 학부모를 구별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권의 보편성을 보장할 의무는 국가에 있다. 국가에 인권 보장의 의무를 부여한 것은 국가가 막강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권은 권력에 대항해 자신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다.
각박한 사회에 진정한 인권은 없다
오늘날 교실이 붕괴되고 교권이 훼손되고 교육이 각자도생의 장으로 전락한 데는 물론 국가의 책임이 크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관계를 조화롭게 구축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학생의 인권이 문제가 되면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고, 교권이 훼손되면 이를 강화하는 방식으로는 무너진 교육 현장을 회복할 수 없다. 실효적 교권 침해 대책은 권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권리의 조건인 ‘의무’를 복원하는 일이다.
진정한 인간 존엄을 실현하려면, 권리와 의무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오늘날 인간을 권리의 주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우리는 인간을 일차적으로 ‘의무가 있는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 진정한 의무를 가진 존재일 때만 우리는 동시에 권리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상실하거나 추방돼 무국적자가 된 난민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현실적으로 그는 아무런 의무도 없기에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다. 인권은 이들에게 인간의 가치를 부여할 마지막 수단이다.
그러나 난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자기 이익에 반할 때는 이런 보편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단지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하다.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나의 권리를 훼손한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처럼 권리를 오직 자기 이익으로만 이해하면, 우리는 ‘자기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권리 주장만 난무할 뿐, 우리는 진정한 인권을 지킬 수 없게 된다.
의무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할 국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국가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국가의 헌법적 질서를 유지할 의무뿐만 아니라 다른 시민의 권리를 존중할 의무가 있다. 독일의 기본법은 이를 분명하게 밝힌다. “모든 사람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헌법 질서나 도덕률을 위반하지 않는 한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게 개발할 권리가 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을 의무를 동시에 이행해야 한다.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권을 해치는 것이다.
권리와 인권, 인간 존엄은 결코 자기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끌어다 쓰는 권력 수단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권리일 뿐만 아니라 그에 부응하는 삶의 과제이기도 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인에 대한 존중과 감사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정이 없고 삭막해지는 것 같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은커녕 관계조차 맺지 않는 각박한 사회에 진정한 인권은 없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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