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깎인 연구개발 예산... 과학계 "고위험 연구 하지 말라는 것"

오지혜 2023. 8. 22.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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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눠 먹은 연구비, 짜고 친 연구기획
정부 "상대평가 통해 구조조정 지속" 
원로 과학자 "비효율 책임 떠넘기나"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2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연구·개발(R&D) 제도 혁신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연구개발(R&D) 사업 효율화를 강조해 온 정부가 내년도 주요 R&D 예산을 올해보다 14% 삭감하기로 했다. 이른바 '이권 카르텔' 요소가 있거나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사업 108개를 통·폐합한 결과다. 정부는 R&D 예산이 몸집만 불어나지 않도록, 상대평가 하위 20% 연구들은 구조조정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과학계는 정부가 R&D 관리 책임을 연구자들에게 떠넘긴다며 반발하고 있다.


정부 "카르텔 있다... 낡은 관행 걷어내야"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22일 '정부 R&D 제도 혁신 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 브리핑을 열고 "지난 정부에서 예산은 10조 원 이상 늘었지만, 시스템·인력은 그대로였다"며 "낡은 R&D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고 퍼스트 무버로 혁신해 가겠다"고 밝혔다.

'과학계 R&D 이권 카르텔'을 청산 대상으로 지적해 온 정부는 주요 R&D사업 중 108개를 통폐합하기로 했다. 이에 따른 내년도 주요 R&D 예산은 올해(24조9,500억 원) 대비 13.9% 적은 21조5,000억 원이다. 정부가 주요 R&D 예산을 삭감한 것은 2016년 이후 8년 만인데, 당시 삭감 규모가 전년 대비 0.4%(550억 원)였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이 훨씬 규모가 크다. 해당 예산안은 국회에 송부된 뒤 논의를 거쳐 최종 확정된다.

이 장관은 "나눠 먹기 형식으로 연구비를 가져간다거나, 연구기획 단계에서 특정 단어를 넣어 유리하게 하는 등 카르텔적 요소가 있었다"면서 "최근 몇 년간 예산이 급증한 분야에 대해서도 임무 재설정, 예산 재구조화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에서 카르텔적 면모가 드러났는지는 언급을 피했다.

확보된 예산은 혁신, 필수 R&D에 집중된다. 우선 혁신 R&D에는 예산의 절반인 10조 원을 들인다. 특히 첨단바이오·인공지능(AI) 등 7대 핵심분야를 중심으로 한 국가전략기술 발전을 위해서는 투자 규모를 5조 원가량으로 증액한다. 국가 임무 수행을 위한 필수 R&D는 국방, 공공, 탄소중립, 사업화의 4개 분야로 나눠 기술개발·고도화에 뒤처지지 않게끔 지원한다.

정부는 한시적 구조조정에 그치지 않고 R&D 체질 개선을 해내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범부처 R&D통합관리시스템(IRIS)에 AI·빅데이터 기술을 접목해 관리하고, R&D 사업에 전면 상대평가를 적용해 하위 20%의 미흡한 사업이나 문제가 지적된 사업은 구조조정하고 차년도 예산을 깎는다. 주영창 과기부 혁신본부장은 "그간 부처들이 R&D 평가에 '미흡'을 주는 비율이 매우 낮았는데, 이를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과학계 "매우 모욕적... 연구 움츠러들 것"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의 이번 발표가 예산 재검토를 공식화한 이후 2개월도 채 되지 않아 나온 데 대해 과학계 일각에선 "졸속"이라며 격앙된 반응이 나온다. 불필요한 낭비는 막아야겠지만, 사실상 '되는 사업'만 밀어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정부가 R&D 비효율성의 책임을 과학기술계에 떠미는 상황은 매우 모욕적”이라며 “근거 없이 비율을 정하고 자르는 것은 최소한의 존중도 없이 과학자들 의지를 꺾어버리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 다른 원로 기초과학자는 "당장 업적이 나오는 연구만 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고위험 연구는 하지 말라는 신호와 다를 바 없다"면서 "과학자들의 오랜 노력이 빛을 봐야 할 시기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카르텔'로 몰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과학계가 더욱 움츠러들 것이라는 걱정도 크다. 서울대의 한 이공계 교수는 "과학자는 물론 과학기술단체까지 카르텔, 범죄자 취급당한 초유의 사태"라며 "R&D '칼질' 기조가 연구자들에게는 (자유로운 연구를 막는) 일종의 통제로 느껴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오지혜 기자 5g@hankookilbo.com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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