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농민군의 죽음
[한겨레 프리즘]
[전국 프리즘] 정대하 | 전국부 선임기자
소년 농민군 최동린은 13살에 순국했다. 1894년 12월24일 전남 장흥 석대들 전투에 참전했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나주로 압송돼 나흘 만에 처형됐다. 2차 봉기에 나선 농민군들은 공주에서 패배한 뒤 장흥에서 최후의 전투를 치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 관군과 토벌전에 나선 일본군은 농민군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1895년 1~2월 나주목으로 끌려온 동학의 접주 이상 지도자들만 783명이었다는 기록이 한 일본군 종군일지에 남아 있다. “버려진 주검들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은처럼 얼어붙어 있었다”는 일지의 한 대목에선 전율이 인다.
나주성을 피로 물들였던 학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행사가 128년 만에 열린다. 나주시와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한일동학기행단은 10월 사죄비를 세운다. 사죄비 건립은 한국 학자들과 2018년 나주를 찾았던 한일동학기행단 나카쓰카 아키라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가 제안한 것이다. “왜 살육 역사를 발굴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본인 노교수는 담담하게 답변했다. “나의 조상이 저지른 가해의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게 학자의 양심이다. 나주에 작은 위령탑이라도 세우고 싶다.” 위령탑은 논의 과정에서 사죄비로 바뀌었다.
나주 사죄비는 역사적 화해는 진정성 있는 사과가 전제돼야 함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로 고통받은 한국인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동학기행에 참여했다”는 일본 쪽 기행단의 말에 한국인들이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한다. 사죄비 건립 비용은 한·일 두 나라 시민들의 성금으로 충당한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과거 역사를 직시하고 평화와 상생의 길을 만들고 있다.” 한일동학기행단 박맹수 전 원광대 총장의 지적은 잔잔한 울림을 준다.
나주 출신 최정례는 14살 때 숨졌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강제동원돼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일했던 그는 1944년 12월7일 발생한 도난카이 지진으로 목숨을 잃었다. 일본 전범 기업은 도난카이 지진 때 사망한 최정례 등 조선인 소녀 6명의 죽음에 대해 지금껏 사죄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때 일본 정부와 기업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했다’며 국제법을 들먹인다. 하지만 “여학교에 보내준다”며 10대 소녀들을 회유하고 협박해 강제동원한 뒤 ‘노예노동’을 시킨 것이야말로 국제관습법을 위반한 것이다.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대법원 확정 승소 판결을 받은 피해자 15명 가운데 정부가 주는 판결금을 받지 않은 강제동원 피해자 4명(생존 2명)에게 1억원씩 ‘응원 기금’을 전달했다. 이들은 일본 피고 기업을 대신해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판결금을 지급하는 방안은, 사죄가 빠져 올바른 해법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가해자의 사죄가 빠진 돈으로 피해자의 인권과 존엄이 회복될 수 없다.
10억원을 목표로 한 시민 모금 운동은 내년 6월까지 이어진다. 일본 시민들도 한국 시민단체가 제안한 시민모금 운동에 동행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일본 손해배상 법정 투쟁을 10년간 후원했던 나고야 소송지원모임의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는 회원들과 모은 응원 기금 6만3천엔(약 58만원)을 전달했다. 나고야 소송지원모임 회원들은 매달 둘째 주 금요일이면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앞에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금요행동’을 하고 있다.
최근 한·일 두 나라 정부는 과거의 역사를 봉합한 채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두 나라 시민의 길은 따로 있다. 나주 사죄비 건립 모금 운동과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위로 기금 모금 운동은 한-일 시민연대의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다. 일본의 ‘혐한류’와 한국의 ‘반일 감정’을 딛고 환경·평화·문화 등 각 부문에서 교류를 더욱 늘려가야 한다. 속도는 더디고 힘들겠지만, 가야 할 방향이다.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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