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언어탐방] 뉴스 : 보는 게 아니라 잘 읽어야 하는 것
김용석 | 철학자
이 일은 “마치 숨쉬기나 눈을 깜박이는 것과 같다.”
그 일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뉴스(news)를 대하는 일이다. 뉴스에 지혜롭게 대처하고자 ‘뉴스 사용자 매뉴얼’을 쓴 알랭 드 보통은 “오늘날 우리가 뉴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장소는 지구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우리는 뉴스라는 단어도 ‘매일’ 접하고 있다. 일부 신문의 명칭에는 ‘일보’(日報)라는 말이 붙어 있다. 신문과 일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새로운 소식을 매일 전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뉴스의 사회적 역할이었다.
소식이라는 의미로서 뉴스의 역사는 고대로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대중을 위한 새로운 소식이라는 의미의 뉴스는 17세기 신문(newspaper)의 등장으로 본격화되었다. 18세기에는 유럽에서 일간지들이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며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후에 라디오, 텔레비전, 다양한 온라인 매체들이 뉴스 전달자가 되었다. 스마트폰은 뉴스 소비를 빠르고 과다하게 증폭시켰다. 사람들이 메일이 아니라 ‘수시로’ 뉴스를 확인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지도 한참 되었다.
뉴스 과잉 소비에 분개한 드 보통은 묻는다. “어째서 우리 대중은 계속 뉴스를 확인하는 걸까?” 이어서 스스로 답한다. “이는 공포와 큰 관련이 있다. 뉴스에서 눈을 떼고 나서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습관처럼 불안이 축적된다.”
이런 설명은 ‘양치기 소년’ 우화를 떠올리게 한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양치기 소년의 ‘가짜뉴스’에 온 동네 사람들은 속았고,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는 ‘긴급뉴스’는 믿지 않았다. 이 우화는 거짓말쟁이는 결국 벌받는다는 교훈에 머물지 않는다. 공포와 불안을 자극하면 사람들은 귀가 솔깃해지고 눈을 크게 뜨게 된다. 양치기 소년 우화는 아주 오래전에 현대사회에서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 ‘뉴스 제작과 유포의 한 원형’을 제시했던 것이다.
불안과 공포는 사람들이 계속 뉴스를 확인하는 이유 가운데 일부다. 사람들은 심심풀이로도 뉴스를 본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이 하는 세세한 행동들은, 모두 일일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심심풀이의 개념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심심풀이의 뜻으로 그가 사용한 프랑스어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은 오늘날 국제어가 된 영어 ‘엔터테인먼트’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뉴스를 즐기기도 한다.
뉴스가 우리 일상에 밀착하게 된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새로운 것들’이란 뜻을 지닌 그 말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드 보통은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는 철학자 헤겔의 말 역시 인용한다. 그러면서도 뉴스의 개념에서 핵심은 간과한다. ‘근대화’란 말이 그것이다. 근대화 또는 근대성이란 술어에 있는 ‘모던’(modern)이란 말은 뉴스의 본질을 보여준다.
영어 모던은 라틴어 모데르누스(modernus)에서 유래하며, 이 말의 어근인 모도(modo)에는 ‘바로 지금’이란 뜻이 들어 있다. 모던하다는 것은 항상 현재적이고자 한다는 뜻이며, 근대화란 현재성을 유지해가려는, 그 자체로 모순적인 과정이다. 비가역적 시간의 흐름에서 ‘바로 지금’은 ‘방금 지나간’ 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간 의식은 항상 현재와 함께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새로워져야 한다. 서둘러 지금의 현재를 버리고 ‘새로운 현재’를 계속 만들어내야 한다. 현재를 창밖으로 계속 내던지는 과정에서 뉴스는 생산된다. 끊임없이 새롭게 현재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 뉴스의 본질적 속성이 된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속성인 것 같다. 근대적 인물인 철학자 볼테르는 “새로움을 향한 만인 공통의 취향은 자연의 선물”이라고 했는데, 일찍이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인간 영혼은 새로움을 향해 기운다”고 선수를 친 바 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이런 인지적 편향성에 대해 또 어떤 설명을 할지 모르겠으나, 새로움을 향한 인간 의지를 소통 매체로 일상화한 것이 뉴스라고 할 수 있다(참고로 디지털 사회에서 모든 정보와 기기의 업데이트와 업그레이드도 현재성 추구의 한 현상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문제는 뉴스 범람이다. 새로움이 진부해지는 역설까지 경험하고 있다. “뉴스의 공급량은 거의 무한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드 보통은 범람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뉴스 생산자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정치 뉴스는 우리 사회의 복잡한 역학 관계에 대한 흥미를 끌어내면서도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지적으로 환기해야 하며, 경제 뉴스는 상품경제 아래에 놓인 인간적 현실을 일깨워 감사하는 마음, 정의로운 분노, 죄책감과 경외라는 유익한 감정을 촉진해야 한다. 다 좋은 말이지만, 현실의 언론 매체에는 이상적인 주문일 수 있다.
‘뉴스 다이어트’를 주장하는 스위스 작가 롤프 도벨리는 사람들에게 ‘100% 뉴스 끊기’까지 조언한다. ‘온건하게 뉴스 줄이기’는 마약처럼 다시 중독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는 소극적 대처법이다. 뉴스를 적극적으로 대할 필요도 있다.
오늘 우리는 일상에서 뉴스를 본다. 텔레비전이든, 컴퓨터든 스마트폰이든 사각의 화면에서 뉴스를 본다. 그것을 이미지로 소비한다. 뉴스를 본다는 것은 뉴스를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읽다’라는 말에는 글 읽기를 넘어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하지 본다고 하지 않는다. 영어 읽다(read)라는 말에도 해석하다, 뜻을 알아차리다, 공부하다 등의 속뜻이 있다. 이는 그 말이 사고능력을 뜻하는 라틴어 라티오(ratio)에 뿌리를 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읽음은 이치를 탐구하는 행위다.
오늘날 뉴스는 사건의 먼 원인이나 미래에 끼칠 영향은 소홀히 다루거나 언급을 유보하고 현재에 ‘일어난 일’로서만 이미지화해 다루려는 경향을 강화한다. 그러므로 잘 읽어야 한다. 읽기는 시공간의 이미지를 두뇌 속 언어화 과정으로 이전하는 작업이다. 곧 지식화 작업이다. 어떤 대상을 잘 읽고 나면 그것을 잘 알게 된다. 뉴스는 부박하지만, 그것을 읽어냄으로써 진중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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