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만 R&D 예산 삭감에 과학계 ‘황당’·‘참담’… “국가 경쟁력 결국 훼손될 것”
정부가 30년 넘게 꾸준히 늘려오던 연구개발(R&D) 예산을 내년에 삭감하겠다는 방침을 세우면서 과학계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수십년간 R&D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과학기술 선도국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R&D 관련 예산을 크게 늘린지 얼마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수 부족을 이유로 예산을 삭감할 경우 자칫 추격은커녕 격차가 벌어질 것으로 우려되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28일 R&D 카르텔을 언급하며 예산 재검토를 지시할 때까지만 해도 과학계에선 합리적인 수준에서 예산에 결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윤 대통령이 취임 이후 과학기술을 우대하는 행보를 보여준 것에 대한 기대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비 예산을 20~30% 삭감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과학계의 기대는 불안으로 바뀌었다. 이날 정부가 내년도 주요 R&D 예산을 13.9% 삭감한다고 발표하면서 불안은 현실이 됐다. 출연연의 연구비 예산도 20% 삭감이 확정됐다.
정부의 주요 R&D 예산 삭감 발표를 지켜본 과학계의 반응은 한 마디로 ‘참담’이었다. 한 출연연 고위관계자는 “예산 삭감이 확정되자마자 내부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며 “신규 사업은 아예 편성할 수가 없고, 박사후연구원이나 학생연구원은 상당수 내보내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과학기술을 강조하는데 정작 예산을 수십년 만에 대폭 삭감하는 정 반대의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으니 이해할 수가 없다”며 “R&D 사업에 문제가 있다면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설명을 해주고 예산을 깎으면 이해라도 할 텐데 아무런 설명이나 근거도 없이 내년 예산을 일단 20% 줄이라고 하니 황당하다”고 말했다.
4대 과학기술원 소속의 한 교수도 “R&D 예산을 삭감하는 건 중차대한 일인데 대통령의 한마디에 불과 두 달도 안돼서 예산이 뭉텅뭉텅 날라갔다”며 “세수가 줄어드니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취지는 알겠지만, 이런 식으로 과학계를 카르텔로 몰아가면서 국가 R&D 투자를 줄이면 장기적으로 대한민국의 경쟁력 자체가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출연연의 다른 책임연구원도 “대한민국은 기술로 먹고 사는 나라였는데 이런 식으로 기초연구에 들어가는 투자를 갑자기 줄이면 연구의 연속성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고민 없이 과학계 전반에 너무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 것 같다”고 말했다.
일선 연구자들이 당혹스러움을 넘어서 참담함까지 이야기하는 건 정부의 국가 R&D 예산 삭감이 과학계의 의견 수렴 한 번 없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은 R&D 예산 삭감을 추진하면서 문재인 정부 때 R&D 예산이 무분별하게 증가했기 때문에 비효율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문재인 정부 때 국가 R&D 예산이 급격하게 증가한 건 사실이다. 국가 R&D 예산은 이명박 정부 때였던 2008년 10조원을 막 넘겼고 박근혜 정부 때는 16조원을 넘어섰다. 정권마다 중점을 두는 분야는 달라도 R&D 예산 자체를 줄이는 경우는 없었다. 실제로 국가 R&D 예산이 삭감된 건 1991년이 마지막이었다. 전체 예산 대비 R&D 예산 비중은 늘 5%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정부 지출 자체가 늘어나면서 국가 R&D 예산도 덩달아 뛰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때인 2017년 19조5000억원이던 국가 R&D 예산은 지난해 29조원을 넘어섰다. 불과 5년 만에 10조원이 늘어난 것이다.
이를 놓고 정부와 여당은 문재인 정부 때 소부장 대응과 감염병 대응을 위한 R&D 예산이 대폭 증가했다가 줄어들지 않는 등의 비효율이 심각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면서 R&D 부처와 기관, 브로커가 공생하는 카르텔이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 국민의힘 과학기술특별위원회는 지난 21일 브리핑에서 “지난 2012년부터 정부 R&D 예산은 2배 정도 증가한 반면, 연구관리 전문기관은 4배 이상 늘었다”며 “국가경쟁력 강화에 쓰여야 할 예산이 관리 기능만 늘어나는 엉뚱한 곳에 쓰인 셈”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과기정통부가 개선 방안을 내놓는 자리에서도 카르텔의 실체는 불분명했다. 국가 R&D 예산 삭감안을 마련한 실무진인 오대현 연구개발투자심의국장은 “카르텔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 특정 사업이 카르텔이라고 지목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도 구체적인 카르텔의 사례를 들지 못했다. 당정 협의 과정에서 중소기업이 국가 R&D 사업을 딸 수 있게 브로커가 활동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30조원의 국가 R&D 예산에서 극히 일부분에 그친다.
한 과학계 관계자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브로커를 잡는 것도 중요하고, 나눠먹기식 R&D 사업을 제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런 부분을 다 모아봤자 얼마나 될 지 의문”이라며 “실체도 없는 카르텔 때문에 국가 R&D 예산 전체를 줄이는 건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출연연 관계자도 “소부장 대응이나 감염병 대응에 들어간 R&D 예산을 정상화할 거면 그 분야만 줄이면 될 일이지 왜 아무런 상관없는 출연연 예산까지 전부 20% 일괄 삭감하는 지 이해가 안 된다”며 “이번 조치로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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