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에 ‘유령’으로 우뚝 선 최재림 ‘더뎌도 차근차근’
가슴이 벅차올랐다. 14년 전 뮤지컬 배우로 데뷔한 이래 이날만을 꿈꿔오지 않았던가. 배우 최재림(38)이 지난 11일 저녁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펼쳐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무대에 처음 섰다. 언젠가 ‘유령’ 역을 꼭 해보고 싶다는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2009년 봄, 그는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을 봤다. 뮤지컬 ‘렌트’로 갓 데뷔한 직후였다. 1986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1988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전세계 1억6000만명이 관람한 기록적인 작품이자 뮤지컬 거장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대표작 ‘오페라의 유령’은 배우들에게 꿈의 무대다. 젊은 패기에 주인공 유령과 라울 역 모두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대신 앙상블(코러스 배우)과 라울 커버(유고 시 대역)를 제안받았다. 그는 제안을 사양하고 다른 뮤지컬 오디션을 봤다.
“커리어를 10년, 15년 뒤까지 길게 봤어요. 운 좋게 데뷔를 ‘렌트’ 주요 인물인 콜린 역으로 했거든요. 이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도전을 하자는 생각에 ‘헤어스프레이’ 오디션을 봤고 배역을 따냈죠.”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최재림이 당시를 떠올렸다.
더뎌도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남들보다 늦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성악을 시작했지만, 성당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쌓은 기본기로 차근차근 뒤따라갔다. 대학 성악과에 들어간 뒤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하면서 음역 폭을 넓혔다. 군 복무 시절 뮤지컬을 하는 후임병을 만나면서 뮤지컬에 관심을 가졌다. 제대 후 박칼린 감독의 뮤지컬 아카데미를 찾아가 스승과 제자로 첫 인연을 맺었다.
큰 기회가 찾아왔다. 2010년 한국방송(KBS)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 합창단 편에 박칼린 감독의 보조이자 안무 선생님으로 등장해 눈도장을 찍은 것이다. 이후 몇몇 작품을 하며 인지도를 더욱 높이던 그는 돌연 활동을 멈추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전문사(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문득 연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연기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죠. 이전에는 대사를 잘 외우고 잘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면, 연극원에서 상대와 관계를 맺고 자극을 주고받는 사고방식을 배웠어요. 2년 뒤 돌아와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하는데, ‘노래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대학원 가서 연기 좀 배웠네’ 하는 말을 들었어요. 뿌듯했죠.”
이후 뮤지컬계를 종횡무진하며 공력을 쌓아오더니 마침내 ‘오페라의 유령’ 유령 역을 따냈다. “대기업에 부장급으로 스카우트된 기분이었어요. 열심히 하면 임원을 달 수도 있으니 어찌 야망이 안 생기겠어요? 하지만 그걸 해내기 위해 나를 갈아 넣어야 하는구나 하는 부담감과 책임감도 뒤따르기 마련이죠.”
그에 앞서 조승우·김주택·전동석이 지난 3월 부산 공연부터 유령을 연기해왔다. 뒤늦게 합류하게 된 최재림은 다른 배우들 연기를 보고 머릿속으로 자신의 연기를 상상하며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를 연구했다. 첫 공연 2주 전 본연습에 합류하니 연출이 “혼자서 고민 많이 하며 숙성시켜온 것이 보인다”고 말했다.
드디어 첫 공연. 188㎝의 큰 키에 폭발적인 성량은 유령의 카리스마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기분 좋게 흥분된 상태로 무대에 섰어요. 의도한 바대로 연기했는데, 기합이 많이 들어가 있다 보니 몇몇 장면은 넘치지 않았나 싶어요.” 첫 공연이 끝나고 분장실로 찾아온 박칼린 감독은 최재림을 꼭 안아주면서 “수고했어. 아주 좋았어”라고 말해줬다. “그 얘기를 듣고 부담감과 책임감으로 잔뜩 들어가 있던 기합이 스르르 풀리더라고요. 물론 칼린 선생님은 바로 다음날 고칠 점을 짚어주셨죠. 내가 이분한테 여전히 배우는구나, 그런 사람을 만나서 참 행운이다, 생각했어요.”
그는 최근 드라마에도 출연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지난해 ‘그린마더스클럽’(JTBC)에 이어 올해 ‘마당이 있는 집’(ENA)에 출연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난달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MBC)에 출연해 털털한 모습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령이 농촌에서 태어났나 할 정도로 있는 그대로 보여드렸죠. 예능으로 시청자와 공감하는 건 즐겁지만, 너무 몰두하는 건 조심하려 해요. 분위기에 휘둘리거나 주객이 전도될 수도 있거든요. 본업에 충실하다가 한번씩 외딴섬 가서 휴가를 즐기고 오는 것처럼 아끼고 싶어요.”
지금 최재림에겐 “경력의 정점을 맞았다”는 표현이 붙는다.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현재로선 맞는 거 같고요, 앞으로 이 말이 계속 쓰이도록 노력할 겁니다. 10년, 15년 뒤에는 영화·드라마도 하면서 공연도 놓지 않는 배우, 뮤지컬계에서 어른·선배님·선생님으로 존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나이에 맞는 배역이 있으면 메인에서 한걸음 물러나도 공연 전체를 감싸줄 수 있는 역할, 그런 걸 내다보고 있어요.”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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