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일상, 그 사이를 끊임없이 탐색한 리얼리즘

노형석 2023. 8. 2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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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작가 개인전
아크릴 과슈 물감으로 그린 이우성 작가의 신작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 두번 반복해서 그린’(2023). 노형석 기자

현재 한국 미술판의 차세대 청년 화가들 가운데 그림 내공이 가장 뛰어난 이는 누구일까.

미술인들마다 관점의 차이가 표출될 수밖에 없겠지만, 올해 40줄에 접어든 이우성 작가라면 공통적으로 꼽힐 공산이 가장 높은 ‘대표선수’ 축에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홍익대 회화과를 거쳐 201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을 졸업한 그는 그뒤 10여년 만에 여러 대안공간과 갤러리, 미술관 전시를 치르면서 국내 리얼리즘 화단에 낯설고도 친숙한 자기 영역을 닦았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한국 청년세대들의 군상과 그들이 겪는 지금의 삶과 일상을 갈고닦은 특유의 선묘와 색조로 생경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해냈다. 걸개그림·괘불·극장간판·민화 같은 과거의 형식틀을 적극적으로 빌어 표현형식을 새롭게 창신한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국정농단과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촛불혁명 대열의 합창하는 걸개그림 형식의 대형 군상화부터 암산을 오르내린 자신과 친구의 몽상기, 동료와 가족의 일상적인 표정과 몸짓들, 동성·이성과의 키스 장면을 담은 그림들, 성소수자 작가로서 손을 겹쳐 연대를 표시하는 연필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한국 청년들 앞에 놓인 거시적 시대성과 미시적 일상성 사이를 끊임없이 탐색하면서 자신이 보는 ‘지금 이 순간’ 곁의 사람들과 풍경, 사물들을 담으려 노력해왔다.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의 세부. 노형석 기자

지난 9일부터 서울 북촌 소격동 학고재화랑에서 시작한 이 작가의 신작전 ‘여기 앉아보세요’는 이런 작가의 노력이 새로운 양상으로 숙성되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얼추 짐작하게 한다. 34점의 출품작들은 최근 수년간 작업한 그의 근작들처럼 젊은 청춘남녀의 일상 활동이나 작가의 주변 동료와 가족들의 모습을 담은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스치듯 보면 밝고 유쾌한 젊은이들의 한때나 훈훈한 교감이 넘치는 친구, 가족들의 풍경 같지만, 그림들의 색조와 형상의 윤곽을 뜯어보면 어딘지 모르게 맥이 풀리고 불안감을 일으킨다. 한옥 문간에 앉아 웃고 있는 젊은 여성과 유심히 노트북을 보거나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뚫어지게 보는 남자 등의 그림 속 인물들은 대개 배경에 온전히 어울리지 못하고 몸체의 일부가 떠 있는 듯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캔버스에 스며들지 않는 아크릴 구아슈란 안료를 써서 그렸기 때문인데, 화폭에 어울리지 않고 따로 분리되는 느낌은 군상들이 입은 옷의 어둡고 짙은 빛깔이나 여성들이 산기슭에서 조망하는 해 저무는 하늘의 질질 흘러내리는 물감의 묘사 등에서 도드라지고 있다.

신작들의 이미지들은 사실적 묘사에 집착하지 않고 세부적으로 잔 붓질을 쓰지 않고 휘휘 흩어지듯 붓질을 풀어놓는 쪽에 가깝다. 멀리서 보면 사진처럼 생생한 이미지로 비치지만, 다가가면 모호해지고 구체적인 상이 사라지는 셈이다. 이런 특징은 이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이자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조각보 캔버스를 기워만든 대작 ‘해질녘 노을빛과 친구들’과 일종의 가족도인 ‘엎치락뒤치락’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지금 시대 청년 동료와 가족들 사이의 연대와 관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설명이 붙었지만, 그림의 세부 묘사는 이런 설명과 엇나가는 느낌이다. 그림 속 인물을 조금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작가는 털어놓았지만, 지금의 시대와 세계의 불안과 불명확함에 대한 잠재의식이 표출된 단면은 아닐까. 더욱 흥미로운 건 작업실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퇴근하고, 커피 마시고 컵라면을 먹는 작가의 힘겨운 일상을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단순하고 희화적인 캐릭터 도상의 연작으로 그려 넣고 연작 소품들로 전시했다는 점이다.

이우성 작가는 “복잡하고 괴롭고 힘든 세상사를 무거움으로 그리는 것보다는 필터링해서 가볍게 해보고 싶었는데, 내가 겪은 작업의 기억을 생각하면서 그리다 보니 이런 캐릭터가 나왔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말마따나 묘사하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순간의 기억 자체를 담아내어 기록하는 것이 작가에겐 중요한 요점으로 보인다. ‘저에게 사람은 모든 것이 표정이고 메시지입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 것이 제 작업이지요.’(2017년 작업 노트의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내달 13일까지.

이우성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소격동 학고재화랑 전시장 들머리. 선사시대 암각화의 풍경을 걸개그림 형식에 그린 작품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왼쪽, 2023)과 거울 이미지를 그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사라지고’(2023)가 내걸려있다. 노형석 기자
‘두 사람과 빛나는 파란색’(2023)의 일부분. 노형석 기자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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