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만에 R&D 예산 줄인다...내년 13.9% 삭감 하위 20%사업 구조조정
1991년 이후 첫 감액
국가전략기술 투자는 계속 늘리기로
기초연구 투자도 10% 넘게 삭감
국가 R&D 사업 중 하위 20%는 구조조정
정부가 주요 연구개발(R&D) 사업에 투입하는 내년도 예산을 14% 가까이 삭감했다. 일반 R&D 예산도 삭감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내년도 국가 R&D 예산 자체가 올해보다 큰 폭으로 삭감될 가능성이 크다. 국가 R&D 예산이 삭감되는 건 1991년 이후 처음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첨단바이오, 양자, 우주, 차세대 원자력 등 윤석열 정부가 미래전략기술로 꼽은 분야에는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기초연구는 예산이 삭감됐다. 과학기술계는 기초연구 없는 응용연구는 존재할 수 없다며 반발하는 분위기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22일 오전 이우일 부의장 주재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제4회 심의회의’를 열고 ‘2024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을 심의·의결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의장을 맡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과학기술 분야 최상위 의사결정 기구다.
당초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6월 말에 내년도 R&D 예산안을 확정해 기획재정부에 넘길 예정이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지난 6월 28일 2023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과학계 카르텔을 질타하면서 R&D 예산안은 원점에서 재검토하게 됐다. 당시 윤 대통령은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내년 주요 R&D 예산 13.9%↓… 기초연구도 10% 넘게 삭감
두 달에 걸친 재검토 끝에 과기정통부는 내년도 주요 R&D 사업 예산안을 올해보다 13.9% 감소한 21조5000억원으로 확정했다. 정부 R&D 사업은 주요 R&D와 일반 R&D 사업으로 나뉜다. 주요 R&D 사업은 기초·응용·개발 등 기술개발과 출연연, 국공립연구소의 주요 연구비, 범부처사업, 시설장비구축 등에 쓰이는 예산이다. 대학 지원금이나 정책연구비, 국제부담금 등에 들어가는 일반 R&D와 별개로 정부의 핵심 R&D 사업에 쓰이는 돈이라고 보면 된다.
주요 R&D 사업 예산은 정부 R&D 예산이 늘어나면서 덩달아 매년 증가일로였다. 하지만 이번에 13.9% 삭감되면서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수준(21조6000억원)으로 돌아가게 됐다.
과기정통부는 R&D 예산이 삭감되지만 나눠주기식 사업이나 성과가 부진한 사업을 통폐합하면서 예산을 절감한 것일뿐 정상적인 연구에 투입되는 예산은 거의 줄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108개 사업을 통·폐합하면서 3조4000억원을 줄인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국가전략기술에는 투자를 늘렸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윤석열 정부가 첨단기술로 꼽은 12대 국가전략기술에는 올해보다 6.3% 증가한 5조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첨단바이오(16.1%), 인공지능(4.5%), 사이버보안(14.5%), 양자(20.1%), 반도체(5.5%), 이차전지(19.7%), 우주(11.5%) 등의 분야가 R&D 예산이 증가했다.보스턴 바이오협력 프로젝트나 우수 신진연구자 연구비 등 해외 협력과 젊은 연구자를 지원하는 사업도 신설됐다.
하지만 과학계가 우려했던 기초연구 예산 삭감은 현실이 됐다. 기초연구 R&D 예산은 올해보다 10.8% 감소한 2조1000억원으로 책정됐다. 과기정통부는 연구기관 운영에 필요한 인건비와 경상비는 0.2% 늘렸다고 말했지만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늘렸다는 말이 옹색해진다.
◇국가 R&D 사업에 상대평가 도입… 하위 20%는 구조조정 의무화
과기정통부는 정부 R&D 제도 개선안도 함께 발표했다. 윤 대통령이 지적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를 없애기 위한 방안이다. 핵심은 개방과 상대평가다.
우선 국가연구개발혁신법 시행령을 개정해 해외 우수 연구기관의 정부 R&D 사업 참여를 허용하기로 했다. 글로벌 공동협력을 촉진하기 위해서라고 과기정통부는 설명했다. 특히 바이오, 배터리,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기관 사이의 칸막이를 없애기 위해 ‘글로벌톱 전략연구단’ 제도도 도입한다. 경쟁을 통해 상한액 없이 우수한 컨소시엄을 선정해 R&D 예산을 배정하는 사업이다. 국내 산학연 연구자가 소속기관에 구애받지 않고 해외기관과 협력하도록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예산과 인력 운영을 개선하는 방안도 나왔다. 매트릭스형 통합 예산을 도입하는 게 골자다. 지금은 기관별로 예산요구안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방식인데, 앞으로는 여러 연구기관이 참여하는 핵심 임무별로 예산을 배정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인력 운영도 소속기관에 구애받지 않고 연구 과제별로 탄력적으로 한다는 방침이다.
국가 R&D 사업에 대한 평가도 체계적으로 바뀐다. 올해 하반기부터 R&D 사업의 성과가 부진하거나 낭비적인 요소가 있는 경우 재정집행을 점검하고, 이를 통해 다음연도 예산 배분에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또 R&D 사업평가에 상대평가를 도입해 하위 20% 사업은 구조조정하도록 했다. 지금은 상대평가가 권고로만 이뤄지고 있다보니 미흡 평가를 받는 사업이 2.9%에 머무르고 있다. 앞으로는 하위 20% 사업은 무조건 미흡 평가를 받고 구조조정된다. 이밖에 연구수당과 성과급을 조정하고, 회의비와 식비도 제한하기로 했다.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는 투자와 평가부서를 통합해서 예산 배분과 구조조정을 도맡게 된다. 민간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문성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그동안 누적된 비효율을 과감히 걷어내어 효율화하고, 예산과 제도를 혁신해 이권 카르텔이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R&D 비효율을 미리 예방하고 대처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과기정통부부터 먼저 혁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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