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시지프스’라는 이재명 [김지현의 정치언락]
“비틀어진 세상을 바로 펴는 것이 이번 생에 저의 소명이라 믿습니다. 어떤 고난에도 굽힘없이 소명을 다할 것입니다. 기꺼이 시지프스가 될 것입니다.”
8월 17일 오전 10시 24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백현동 개발 특혜 의혹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면서 이 같이 말했습니다. 이 대표가 스스로를 빗댄 ‘시지프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을 기만한 대가로 산 정상까지 바위를 굴려 올리는 무한한 형벌을 받은 인물이죠.
이 대표는 당에서 미리 설치해 둔 50㎝ 높이의 파란색 단상 위에 올라 장장 14분에 걸쳐 준비해 온 1900자 분량의 입장문을 읽었습니다. 이전 출석 때보다 목소리 톤은 올라갔고, 중간중간 격앙된 듯한 모습도 보이더군요. 이번이 당 대표 취임 후 벌써 네 번째 검찰 출석이니 초조한 걸 수도, 아니면 반대로 심적 여유가 생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역사와 민주주의가 전진해왔던 것처럼 쓰러진 저를 디딤돌 삼아서 더 많은 이들이 어깨 걸고 전진을 할 수 있다면 이것 역시 국가와 국민에 대한 기여와 헌신 아니겠습니까?”
“우리 속에 널리 퍼진 두려움과 무력감을 투쟁의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공포통치 종식과 민주정치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제물이 되겠습니다.”
자신의 경기지사 시절 관련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간 것이 왜 국가와 국민에 대한 기여와 헌신이라는 걸까요. 국민을 대신해 조사받은 건 아닌데 말이죠.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도 17일 “항일 독립운동을 한 것도, 민주화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산업에 기여한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의아스럽다. 검찰청 앞에서 희생과 제물, 탄압을 운운하며 신파극을 연출하는 비리 혐의자의 모습에 상식을 가진 국민은 아연실색할 지경”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다소 독특한 입장문은 “기꺼이 시지프스가 되겠다”는 부분에서 특이함이 정점을 찍더군요.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는 꾀와 욕심이 많고 남을 속이기를 좋아했던 것으로 그려집니다. 신에게 대적하다 죽게 됐을 때도 속임수를 써서 지하 세계로부터 탈출했던 인물이죠. 그러다 다시 잡힌 시지프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에 대한 대가로, 산 정상까지 밀어올린 바위가 굴러떨어지면 다시 처음부터 밀어올리는 무한한 형벌을 받습니다.
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도 18일 채널A에 출연해 “적절한 비유가 아닌 것 같다”며 “안 끝나면 되겠나. 이 대표 개인으로도 끝나야 하고, 민주당으로도 끝나야 하고, 국가적으로 끝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시지프스 관련 내용은 애초 입장문 초안에는 없었는데 중간 수정 과정에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저도 처음엔 이 대표가 시지프스가 아니라,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가 대신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를 잘못 쓴 건 아닌가 잠시 의아했습니다. 마침 요즘 영화 ’오펜하이머‘ 때문에 원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인기라니 말이죠.
논란과 조롱이 이어지자 이 대표의 핵심 최측근들이 반격에 나섰습니다. 김남준 당 대표 정무조정부실장은 18일 페이스북에 ‘이재명 그리고 시지프스 신화’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이 대표가 말한 시지프스는 알베르 카뮈를 통해 바라봐야 온전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반박했습니다. 카뮈는 자신의 대표 철학 에세이인 ‘시지프스 신화’에서 시지프스가 무한한 형벌을 기꺼이 감내해내 비로소 부조리한 운명을 극복했다고 평가했죠. 이 대표도 윤석열 정권의 부조리에 기꺼이 맞서 싸우겠다는 취지로 쓴 내용이란 겁니다.
김 부실장은 “이 대표의 시지프스 선언은 부조리에 맞서야 할 자신의 숙명을 온전히 인식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었으며 마침내 무도한 정권의 부조리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비장한 선전포고”라며 “‘너는 시지프 꼴이 될거야’라고 원색적 비난을 하는 국민의힘 논평의 수준이 참으로 낯부끄럽다. 비유도 제대로 해석 못하는 참담한 국어수준이리라 생각하고 싶지 않는다”고 저격했습니다.
친명계 좌장인 정성호 의원도 같은 날 SBS라디오에서 “여당에서는 시지프스가 굉장히 욕심 많은 왕으로 처벌을 받았다고 얘기를 하는데, 아마 (이 대표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본 것 같다. 결국 형벌을 받아서 끊임없이 (산을) 올라가지만 내려오면서 자기 의지를 갖고 ‘어쨌든 희망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출마 회견을 하면서 “민주주의 승리를 위한 사명감과 신념을 갖고, 절망을 모르는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최후의 승리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했던 것을 오마주했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시지프스의 난’ 속에 13시간 넘게 검찰조사를 받고 나온 이 대표는 “(검찰이) 목표를 정해놓고 사실과 사건을 꿰맞춰 간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비록 들어갈 땐 혼자였지만 나올 땐 자정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정청래 박찬대 서영교 장경태 최고위원을 비롯해 조정식 사무총장과 김민석 정책위 의장 등 친명 지도부의 엄호를 받았죠. 사실 이 대표의 첫 출석 때만도 누가 동행했고, 누가 마중 나갔고가 기자들 사이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이것도 벌써 4번째 반복하다 보니 솔직히 다들 관심도, 감흥도 없습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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