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궈달라가 직접 한국의 아이버슨이라고 불러줬죠”

김종수 2023. 8. 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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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84)] '마산 아이버슨' 박경상

 

프로농구선수의 별명중 본인과 NBA 선수의 이름이 빗대어져서 합성어 식으로 만들어진 것 중에는 기발한 애칭이 많다. 서비츠키(서장훈+노비츠키), 임내쉬(임재현+내쉬), 강페니(강병현+페니 하더웨이), 주키드(주희정+키드), 구비 브라이언트(김민구+브라이어언트), 바레장재석(장재석+바레장), 효궈달라(정효근+이궈달라), 주리핀(주태수+그리핀), 디안드레봉수(김봉수+디안드레 조던), 송창무톰보(송창무+무톰보), 대성웨스트브룩(이대성+웨스트브룩) 등 상당히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하나를 딱 꼽아보라면 상당수 팬들은 박경상(32‧‧178.6cm)의 ‘아이버슨’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박경상의 별명은 다른 NBA 합성 애칭과는 결이 다를 정도로 독보적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선수 같은 경우 열성 팬이 아니면 ‘어? 그 선수에게 그런 별명도 있었어?’라고 되물어볼 만한 것이 상당수다.


다른 별명이 생기면 자연스레 묻히기도 한다. 반면 박경상은 다르다. 두 개의 이름이 섞인 대다수 애칭과 달리 박경상은 그냥 ‘아이버슨’으로 통한다. 어지간한 농구팬이라면 알고있는 별명이며 선수 생활 내내 특별한 다른 별명은 없었다. KBL기준 박경상하면 아이버슨, 아이버슨하면 박경상이었다.


구태여 NBA식으로 가르지 않고 ‘컴퓨터 가드’, ‘캥거루 슈터’, ‘람보슈터’, ‘두목호랑이’ 등 역대급으로 유명한 별명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다. 언뜻보면 키작고 득점력 좋아서 생긴 별명같지만 나름 전통도 있다. KBL-NBA 캠프에 참여했던 고등학생 시절, 무려 NBA 스타 안드레 이궈달라에게서 사사(?) 받았다. 그야말로 최고의 별명중 하나다. 그런 박경상에게 이궈달라와 아이버슨 중 누가 더 좋은지 엉뚱한 질문을 한번 던져봤다.


“하하핫…, 저같은 단신 선수에게 아이버슨은 영웅이죠. 키가 작아도 정상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단신들의 희망 아닙니까. 한때는 아이버슨을 따라하고 싶었지만 실력은 당연하거니와 플레이 스타일 조차 비슷하게도 힘들더라고요. 반면 이궈달라는 모든 면에서 저와 유형이 다르죠. 하지만 제 평생 잊지 못할 별명을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정말 고마운 분입니다. 고맙기는 이궈달라, 선수로서의 선호도는 아이버슨입니다”


별명까지는 아니지만 박경상은 남자 배구 팬들로부터 ‘꽃사슴 도둑’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자배구 최고 인기스타중 한명인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배구단 '꽃사슴' 황연주(37‧177cm)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박경상과 황연주의 결혼은 농구팬뿐 아니라 배구팬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배구팬들의 연인을 훔쳐간 죄로 적지않은 질투 어린 시선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NBA 스타의 극찬을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경상은 선수로서의 재능도 뛰어났다. 패서가 아닌 공격수를 보기에 지나치게 작은 신장이 발목을 잡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스포츠에 만약은 없다지만 박경상이 10cm만 더 컸더라면 그의 농구 인생은 바뀌었을 가능성도 높다. 더불어 본문을 통해 언급하겠지만 이런저런 아쉬운 상황도 박경상의 성장에 장애물로 작용했다.


지난시즌을 끝으로 현역생활을 은퇴한 박경상은 자신의 데뷔팀이자 마지막팀인 KCC에서 전력분석원으로 새로운 농구 인생을 시작한다. 다소 아쉽고 낯설기도 하지만 또 다른 길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고 밝히는 그이다. 오랜시간 득점형 단신 듀얼가드로 코트를 누벼온 박경상의 농구 인생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 박경상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365경기 출전, 평균 5.3득점, 1.8리바운드, 1.7어시스트, 0.6스틸

⁕ 정규리그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3년 1월 24일 부산 KT전 = 28득점 / 3점슛 성공 ☞ 2019년 10월 13일 서울 삼성전 = 6개 / 어시스트 ☞ 2013년 1월 19일 울산 모비전 = 12개 / 리바운드 ☞ 2018년 12월 15일 서울 삼성전 = 8개 / 스틸 ☞ 2015년 1월 30일 원주 동부전 = 4개​
 

 

“전주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입니다. 항상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이제 전력분석원 역할을 맡았으니까 거기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 외국인선수 봤고요. 이제 그 부분은 마무리되었으니까 최근에는 대학 선수들 경기 보러 다니고 그러고 있어요. 저희가 신인드래프트에서 몇 순위를 잡을지 알 수 없으니까 최대한 많은 선수들을 보고 분석하고 그러고 있죠. 솔직히 아직은 제가 은퇴를 했구나 하는 것이 실감이 안날 때도 있어요. 선수들이 연습경기하고 그러면 저기 함께 있어야 될 것 같고, 같이 뛰고 싶기도 하고 그래요. 대부분 은퇴 선수들이 비슷할 거에요. 지금껏 대부분의 인생을 살아온 길이니까요. 지금하는 일도 흥미로우니까 서서히 새로운 삶에 적응할 것이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고민도 많았어요. KCC측에서 먼저 전력분석원 자리를 제시해줬는데 현역 생활에 대한 연장 의지도 있었거든요. 주변 사람들 특히 아내와 함께 고민했고 결국 앞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Q.지난 시즌 경기력이 나쁘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아쉬웠을 듯 싶어요.
이런저런 상황을 떠나서 개인적으로는 아쉬웠죠. 나름대로 36살 정도까지는 뛰어보고 싶다는 것이 제 목표였거든요. 주변에서도 지난 시즌 나쁘지 않았는데 왜 은퇴하냐고 물어보는 분들도 계셨고요. 사실 제가 지난 시즌을 앞두고 전주에 오기 전까지 2년 정도를 농구를 거의 못했어요. 팀에 소속만 되어있었지 코트 감각이라던지 경기력 그런 것들이 완전히 다운된 상태였죠. 그러다가 KCC에서 기회를 받으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보면 되요.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자신감도 살아났고요. 하지만 현실을 냉정히 봐야죠. 제가 어린 유망주같으면 팀에서도 전략적으로 키우고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나름 노장이잖아요. 현재의 탄탄한 선수 구성원에 더해 키워야 될 젊은 선수들도 있고,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할 듯 싶어요. 현역 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이제 전력분석원 등 다른 곳에서 풀어야죠.

​​​​Q.전력분석원을 하게되면서 선수들을 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그럼요. 달라지더라고요. 특히 아마농구 후배들에게 관심이 많이 생기고 있어요. 예전같으면 그냥 잘하고 못하고 그런식으로 밖에 안보였는데 요즘은 좀 디테일하게 입체적으로 보인다고 할까요. 저 선수의 장점은 뭐고 단점은 뭔데 저것만 고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등. 어찌보면 지도자가 가져야 될 시선과 마인드이기는 한데 전력분석원도 어느 정도는 그런 부분을 갖추고있어도 나쁘지 않을 듯 싶어요. 요새는 단신 선수가 살아남기 더더욱 힘든게 사실이에요. 장신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가 정말 많아졌거든요. 엇비슷하거나 아니 조금 기술적으로 떨어져도 성장 가능성 등을 봐서 단신보다는 장신 선수를 선호하는게 사실이거든요. 단신 선수가 프로 무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만의 확실한 무기를 장착하는게 필수인 듯 싶어요. 대학 시절까지야 외국인 선수가 없으니까 어느 정도 고르게 잘하기만 해도 통하거든요. 프로는 달라요. 선수들의 레벨도 훨씬 높거니와 외국인 선수도 버티고 있으니 어중간하게 플레이해서는 어림도 없죠. 선수 본인이 스스로를 잘 체크하면서 프로에서도 통할만한 시그니처 무브를 발굴하려는 노력을 해야 되요. 저도 현재 배우는 단계인지라 잘 나서지는 않지만 가끔 그게 보이는 선수들이 있으면 넌지시 조언은 해주려고 합니다. 

 


​​​​Q.KCC에서 많은 시즌을 보내지 않았음에도 팀에 애정이 상당한 듯 보여요.
아무래도 처음에 입단한 팀이다보니 애정? 애착? 그런 감정이 좀 있죠. 저를 프로의 무대로 이끌어준 팀이었고 어린 나이였지만 농구 환경, 전주 팬들의 뜨거운 함성 등이 뇌리에 깊이 박혀있던 탓이 아닐까 싶어요. KCC에서 얼마 뛰지 못하고 현대모비스로 갔잖아요. 사실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그때라고 보는게 맞아요. 유재학 감독님이 많이 밀어주시고 그래서 경기도 많이 뛰고 우승도 경험하고 그랬죠. 그 시기에 빛을 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것과는 별개로 KCC에 대한 남다른 감정이 항상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더불어 친한 사람들이 많은 것도 한몫한 것 같아요. 선수들은 물론이거니와 프런트 형들 심지어 식당 아주머니들까지도 친숙하죠. 트레이드를 할 때는 살짝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런 것보다는 좋은 기억이 몇배로 더 많은 팀이니까요. 농구적으로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어서 그런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맞습니다. 농구는 정말 신장이 무기죠”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제가 엄청 시골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삼천포 근방에 있는 학교였는데 당시 여자농구를 지도하던 코치님께서 남자선수들을 찾아다니고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선수로 키울만한 재목들을 발굴하려고 했던 것이죠. 삼천포에 남자농구에 없었던지라 그쪽으로 하나 만들어보고 싶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학교에도 찾아오셔서 선생님에게 누가 운동을 제일 잘하냐고 물어오셨고 저를 추천해주셨어요. 당시에도 키는 작은 편이었는데 잘 뛰고 운동신경도 괜찮았고, 그런 부분을 잘 봐주신 것 같아요. 축구를 한창 좋아해서 밤낮으로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때 당시 발굴되었던 선수가 저 말고도 이대성, 배병준 등이 있어요.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때에요.

​​​​Q.이른바 프로젝트를 통해 키워졌네요?
그런 셈이기는 했는데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부모님께 허락맡고 전학까지 갔는데 남자농구를 키우는 것에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예전부터 잘 알려진 여자농구가 있는데 남자농구까지 신경 써서 창단한다는 것이 반갑지는 않았던 거죠. 늘 그래왔던대로 여자선수들을 키워서 중고등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저희 때문에 막혀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는 어려서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지금와서 돌아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Q.헛! 그럼 거기서 딱 막혀버린 것인가요?
일단은 주춤한거죠. 그리고 진주로 가서 새로운 팀을 창단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구력 문제도 있고, 저학년 때는 농구를 잘 못했어요. 그러다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실력이 많이 늘면서 성적도 나오기 시작했죠. 본래 경남 쪽에서는 마산이 농구를 제일 잘해요. 오래된 만큼 좋은 선수도 많고 거기서 나오는 노하우 등도 분명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저와 배병준은 중학교부터 마산행을 택했습니다. 반면 이대성은 김해로 갔고요.

​​​​Q.운동신경 자체는 상당히 좋았던 듯 싶은데 축구를 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나요. 적어도 키 때문에 손해보고 그런 일은 안 겪었을 것 같아서요.
종종했죠. 제가 처음에 가장 먼저 좋아했던 운동이기도 하고요. 부모님한테도 축구선수로 키워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나요. 헌데 당시 부모님께서는 이를 거절하고 농구를 시키셨는데 이유가 축구를 하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었어요. 잉? 그렇게 따지면 농구는? 사실 두 종목이 별 차이 없거든요. 그냥 당시 주변 분들에게서 축구하니까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등 그런 얘기를 듣고 언뜻 짐작하셨던 것 같아요. 사실 운동신경이나 센스는 좋은데 사이즈 때문에 아쉬웠던 상당수 가드 분들은 내가 축구를 했으면 어땟을까라는 생각을 한 두번 쯤은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Q.농구하는 내내 키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을까요?
아니요. 프로에 막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크게 아쉬움은 없었어요. 당시는 180cm 정도 가드면 작기는 했지만 실력으로 뚫어낼 수 있었던 시절이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급격하게 장신화가 이뤄지면서 신장의 중요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됐죠. 특히 요즘 봐요. 예전같으면 2m면 무조건 빅맨을 봐야 했어요. 장신자가 적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그 정도 신장에서는 느리고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선수가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완전 달라졌어요. 키가 크면서도 정말 잘 달리고 이런저런 플레이까지 고르게 잘해요. 저 프로 초창기와 비교해보면 어느 순간부터 빵하고 신인류가 탄생한 느낌이에요. 그러다보니 단신 가드는 더더욱 설 자리가 적어졌어요. 장신들이 단신 못지않은 기술로 움직임까지 좋아버리면 단신 입장에서는 어디에 경쟁력을 둬야 할지 난감해지죠. 물론 전체적인 농구발전을 위해서는 그게 맞다고보지만 이것은 개인 인터뷰니까 저는 단신 선수들 입장에서 얘기를 해보는 겁니다.

​​​​Q.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항이기는 하지만 키가 190cm만 되었어도 농구하면서 걱정이 없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많은 면에서 달라졌겠죠. 원체 요즘 장신 플레이어가 많은지라 그깟 190cm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저같이 단신으로 살아온 선수들에게는 엄청난거죠. 공격과 수비 모든 면에서 플레이가 업그레이드 되었을 것이고, 적성인 슈팅가드 포지션으로 마음껏 슛 쏘고 달리고 그랬을 듯 싶어요. 무엇보다 제 신장이 그랬다면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스포츠보다도 신장이 중요한 그래서 불공평한 스포츠이기는 해요. 하지만 제가 선택했던 길이기도 하고, 또 그런 면이 매력으로 작용할 때도 있으니까요. 격투기로 따지면 플라이급과 헤비급이 같이 경쟁하는 것이잖아요.

​​​​Q.포지션은 계속 가드였을까요?
그렇죠. 아무래도 제 신장에서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으니까요. 중학교 때까지는 포인트가드를 보고 이후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는 슈팅가드를 했어요. 이게 커리어 전체로보면 아쉬운 부분도 있죠. 제 신장으로는 1번을 잘 소화하는 것 말고는 다른 포지션은 의미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슈팅가드를 했기에 고교 시절 일찍 주목받을 수 있었고, 아…, 이건 참 어려운 문제였네요. 물론 앞서도 언급했듯이 제가 190cm만 되었어도 진짜 적성을 찾아 잘 고를 수 있었을 겁니다. 1번을 보게되면 나름 장신 포인트가드가 되는지라 좀 더 넓은 영역에서의 플레이가 가능했을 듯 싶고 아니면 그냥 슈팅가드로만 뛰었어도 평타는 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Q.마산고 시절이 자주 언급되는데 그때는 신장이고 뭐고, 그냥 거침없었을 듯 싶어요.
당시에는 어렸으니까 운동능력도 좋았고 패기도 넘치던 시절인지라 플레이를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죠. 저도 뭐라고 표현하기는 그런데, 그냥 농구 자체가 잘됐어요. 하고 싶은데로 쭉쭉 풀렸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어요. 경기력이나 성적이 모두 좋은지라 농구하는게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개인 연습도 많이 했어요. 밤에 나와서 슈팅을 500~1,000개씩 던진다던가, 동기부여가 되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그 시절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후 프로에서도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지 않나 싶어요.

“아이버슨으로 불러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Q.아이버슨이라는 별명이 너무 유명해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것인가요?

많이들 알고 계시는대로 NBA 스타 안드레 이궈달라 덕분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KBL-NBA 캠프에 참가했었는데 그때 가르쳐주시던 선생님 중 한분이세요. 선생님들께서 각자 마음에 드는 선수를 뽑아 훈련 시키고 경기를 가지는 과정이 있었는데 이궈달라가 저를 가장 처음에 선발 했어요. 일종의 가상 드래프트였는데 제가 이궈달라 팀의 1순위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대에 걸맞게 곧잘 하니까, ‘너 참 잘한다. 한국의 아이버슨 같다’라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만약 거기서 끝났으면 그런 칭찬을 한번 받았네 하고 말았을 텐데 한술 더 떠서 자신의 SNS에까지 그것을 올린거에요. 슈퍼스타까지는 아니어도 우승도 많이 하고 NBA에서 실속있는 플레이어로 꽤나 족적을 남긴 선수잖아요. 그런 선수가 관심을 보이니까 파급력이 상당하더라고요. 그 뒤로는 다들 저를 아이버슨, 마산 아이버슨 그런 식으로 부르게 됐어요. 솔직히 너무 엄청난 선수의 이름을 별명으로 쓰게된지라 민망할 때도 있었지만 평생 농구해도 변변한 별명 하나 없는 선수도 많잖아요. 개인적으로는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은퇴한 지금도 동아리 농구나 그런 곳을 가면 제 얼굴을 알아본 상태에서 이름보다 별명이 먼저 나오는 분들도 많으세요.

 

 

​​​​Q.DB시절 이상범 전 감독이 작전타임시에 이름말고 별명으로 부르던 것도 종종 봤어요.
프로에서 어느 정도 경력도 쌓고 고참이었던 시절인지라 민망함의 정도는 그때가 제일 컸어요. 동료들도 그렇고 이름 못지않게 아이버슨으로 많이 부르니까 감독님께서도 친근감 혹은 긴장도 풀어줄 겸 별명을 써주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중에는 계속 들으니까 그러려니 싶더라고요. 그냥 이름을 듣는 것과 별반 차이 없었어요.(웃음)

​​​​Q.별명의 뿌리가 된 아이버슨이라는 선수를 좋아하나요?
오우, 당연히 좋아하죠. 원조인데요. 하하핫…, 솔직히 처음에는 크게 관심은 없었어요. 워낙 슈퍼스타인지라 누군지는 알고 있었지만 따로 플레이를 찾아볼 정도의 팬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다가 제가 아이버슨으로 불리게된 이후 더욱 친밀감이 들더라고요. 좀 더 깊이 그 선수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각종 동영상 등을 통해 플레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그러게 됐어요. 이후에는 정말 팬이 되었고요.


​​​​Q.연세대 시절에는 고등학교 시절만큼 각광을 받지못했어요.
제가 은퇴하고 돌아보니 선수가 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못지않게 감독님과의 궁합도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감독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선수가 다르게 만들어질 수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대학교 감독님과 저는 잘 맞지 않았던 듯 싶어요. 시골 마산에서 신나게 농구하다가 대학을 들어오니까 기술 습득보다는 강도 높은 체력훈련 등 그런 것 위주로 했는데 개인적인 저의 성장에는 크게 도움이 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농구를 배우는데 있어서 어떤 시기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단 프로에서 활약하기 위한 농구는 아무래도 대학교 때 많이 만들어지는데 거기서 저는 성장이 멈추었습니다. 물론 팀이 특정 선수를 위해 맞출 수는 없는 것은 맞아요. 제가 못 따라간 부분도 분명 있죠. 당시 감독님이 나쁘다는게 아니에요.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달랐어요. 그래서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Q.대학 시절에 가장 아쉬웠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많아요.(웃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포인트가드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부분입니다. 사실 저는 주전 1번으로 뛰겠다는 언질을 어느 정도 받고 연세대로 간 것이었거든요. 마산고 시절까지야 슈팅가드로 뛰었지만 향후 프로에서 살아남으려면 포인트가드로 뛰어야 했거든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는 대학에서 1번으로 거의 뛰지 못했습니다. (김)지완이가 동기인데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는 플레이 스타일상 그 친구가 좀 더 포인트가드에 가깝기는 했어요. 지금은 프로에서 뒤늦게 득점능력이 확 발전해서 공격형 가드로 불리고 있지만 그때는 그런 화력이 없었어요. 때문에 감독님은 지완이를 주로 1번으로 쓰고 저는 2번으로 많이 기용했어요. 제 득점력을 살리자는 의도였던 것 같지만 저는 포인트가드로 성장해야 할 시기를 놓쳐버린거죠. 결국 프로에 간 이후에 1번으로 경기를 뛸려고 하니 여러 가지로 어려움도 많았고요.

​​​​Q.출전 시간이나 포지션 문제 등을 감안 했을 때 타 대학으로 가는 선택지가 나았을 수도 있었겠어요.
그런 부분만 보면 그래요. 하지만 제가 심각한 연세대 덕후였어요. 특별한 이유없이 연세대를 그냥 좋아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연세대를 가고 싶어했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목표로 하게 됐죠. 고등학교 2학년때 연세대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을 때 정말 기뻤던 기억이 나요. 사실 그 이전에 어지간한 학교에서는 전부 제의가 왔었거든요. 하지만 연세대에서는 말이 없어서 나름 초조했었죠. 그러다가 다른 학교보다 약간 늦게 제의가 들어오자 기분이 남다르더라고요. 누가 뭐라해도 저는 연세대가 목표였으니까요. 

 

 

​​​​Q.KCC에 좋은 순번(4순위)으로 뽑혔어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을까요?
아니요. 예상하지 못했어요. 객관적으로 주변 상황을 둘러봤을 때 높은 픽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 있었어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감은 항상 넘쳤고 대학 때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못한 것은 아니거든요. 주장도 했었고 평균 득점이라던지 눈으로 보이는 성적에서도 상위픽 후보들보다 못할게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부상, 작은 신장 등이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는 생각을 했고 그로인해 혹평도 적지 않았던 기억이 나요. 기대감은 잠시 누르고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4순위에 뽑혀서 다소 놀랐지만 기분은 좋았어요.

​​​​Q.실제로도 첫시즌에 잘했어요.
당시 2라운드까지는 가비지타임만 뛰었어요. 워낙 잘하는 형들이 많아서 기회를 많이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거죠. 그러던 어느날 (신)명호 형이 경기를 앞두고 무릎 통증을 호소했어요. 어지간히 아파도 내색을 안하는 형인데 그렇게 표현할 정도면 진짜 아픈 것이거든요. 그래서 부랴부랴 제가 대체로 선발 투입되었는데 그날 경기에서 상당히 잘했어요, 20득점 안팎으로 득점했을거에요. 허재 감독님께서는 꽂히시면 팍팍 밀어주시는 스타일이시잖아요. 갑자기 들어갔는데도 쫄지않고 과감하게 플레이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신 듯 해요. 그때부터 출장시간이 팍팍 늘면서 핵심전력으로 뛰게 됐죠. 선수는 출장시간이 확보되면 실력이 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자신감도 생기면서 플레이에 여유도 생기고 즐겁게 농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키가 작다=수비가 약하다, 어느 정도 편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Q.신장 때문에 수비가 약하다는 인식이 많은데 지난 시즌 경기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듯 싶더라고요.

감사합니다.(웃음) 사실 제 수비실력이 어떤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신장 때문에 불리한 것은 사실이고, 주변에서도 수비가 약하다 약하다 하니까 저도 어느 순간부터 ‘아, 나는 수비가 약하지’라고 스스로 인정해버리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수비로 공헌한 경기도 분명 있었고…, 생각해보면 주변의 편견에 제 스스로도 말려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요. 공격도 자신감이지만 수비도 자신감이거든요. 나는 수비가 약해가 아닌 나 도 수비 잘하는데 라는 마인드로 뛰었어야 됐다는 뒤늦은 후회도 해봅니다.

​​​​Q.공격 위주의 스타일상 아마 때는 수비를 크게 신경쓰지 않고 플레이 했을 듯 싶어요.
맞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대학교때 농구를 잘 배워야 된다는 것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마산고 시절까지는 아무래도 주득점원 역할을 하다 보니까 공격 쪽에 신경을 써서 경기를 해왔어요. 그러다가 대학교를 올라갔어요. 거기서는 제가 에이스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것을 배우고 다듬을 필요가 있거든요. 하지만 그렇지 못했어요. 바로 그때 수비를 배웠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아쉽게도 정체된 상태로 프로에서 뛰게된건데 사이즈 문제보다는 요령이나 기술을 몰라서 수비에서 더 헤맸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싶어요.

 

 

​​​​Q.그런 상황에서 본인보다 크고 움직임까지 좋은 선수들을 막을 때 힘들었겠네요.
힘들었죠. 솔직히 프로에서 저보다 작은 선수들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다 커요. 거기에 힘 좋고 운동능력까지 갖춘 선수들을 막으려 하다보니 뜻대로 안되더라고요. 계속 고전한 거죠. 그러다가 연차가 쌓이면서 수비의 흐름이나 길 등을 느끼게 되면서 나름 저만의 수비 노하우가 생기게 되더라고요. 키가 작으면 수비에서 불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잘 배우면 어느 정도 선까지는 충분히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단순히 키 크고 잘 달리면 수비가 좋을 것이고 신장이 작으면 수비가 나쁠 것이다가 아닌 수비율을 데이터화 시켜서 객관적으로 해당 선수의 수비능력을 평가하는 자료도 있으면 좋을 듯 싶어요.
공감합니다. 말씀하신데로 키 크고 잘 달리면 수비시에 이점이 엄청 많죠. 설사 뚫렸다해도 뒤따라가서 블록슛을 시도한다던가 높이로 압박할 수 있고 슛을 어렵게 던지게 만드는 플레이 등에서도 용의하죠. 그렇지만 신장이 작아도 정말 수비를 잘하는 선수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현실은 단신들은 한꺼번에 뭉뚱그려져서 수비를 기대 안한다는 식으로 인식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아요. 많은 감독님들께서 장신 라인업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단신들은 스스로 수비 의지를 잃고 포기하게 되요. 키를 억지로 늘릴 수는 없는거잖아요. 향후에도 많은 단신 선수들이 끝없이 쏟아질 텐데, 단신들의 수비법에 대한 연구도 더 활발해지고 더불어 데이터화 된 자료도 나와서 객관적인 평가 기준으로 쓰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Q.공격형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패스도 좋았던 기억이 나요.
하하핫…, 그냥 나름 좋았죠. 하지만 감독님들이 보셨을 때 안정성과는 거리가 살짝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패스 센스나 하이라이트급 패스는 종종 보여줬어요. 하지만 감독님들이 원하시는 1번은 경기 내내 안정적으로 팀원을 살려줄 수 있는 그런 유형이거든요. 냉정하게 제가 그런 스타일과는 거리가 좀 있었죠. 이게 이렇게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잘 보이거든요. 하지만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실제 아이버슨같은 경우도 약간 그런과였잖아요. 그래서 수비나 리딩에 능한 가드 파트너를 붙여서 함께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하지만 저는 그 정도까지 팀을 들었나 놓았나 할 정도의 선수는 아닌지라 그것은 힘들었을 것이다고 봐요. 그냥 지금와서 돌아보면 좀 더 이런저런 부분을 잘 배웠어야 하는데 싶은 후회가 커요. 마음껏 불사르지 못한 부분이 남아있는 거죠.

“김민구 대신에 김종규가 신인으로 들어왔더라면요?”

​​​​Q.첫 시즌 대활약 이후 주전 1번으로 자리를 굳히나 싶었지만 다음 시즌 김민구라는 대형 신인이 들어오면서 출장시간이 확 꺾여버렸어요.

좋은 선수가 들어오게되면 팀 입장에서는 무조건 플러스에요. 하지만 때론 특정 개인에게는 손해가 되는 경우가 있죠. 제가 딱 그랬어요. (김)민구가 보통 신인도 아니고 그야말로 슈퍼루키였잖아요. 제2의 허재 소리도 듣고 국제 경기 등을 통해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고요. 솔직히 민구가 뽑혔을 때도 별반 걱정은 안했어요. 저도 전 시즌에 잘해서 자신감이 넘쳤거든요. 같이 잘하면 되지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죠. 제가 팀의 미래로 주목받다가 민구가 오면서 관심이 넘어갔고 거기에 출장시간까지 확 줄어드니 어느새 자신감도 뚝 떨어지더라고요. 결정적으로 데뷔 3년차 때인가, 저를 믿어주고 키워주셨던 허재 감독님께서 시즌 종료 10경기인가를 남겨놓고 자진사퇴하셨어요. 저한테는 여러모로 안좋은 상황이었죠. 그리고 바로 상무에 입대했고 전역하면서 현대모비스로 트레이드 되었습니다.

 

 

​​​​Q.만약 그때 1순위 지명권을 얻어 김종규를 지명했다면 선수 박경상의 행보는 또 달라졌을 듯 싶어요.
그럴 가능성이 높았겠죠. 국가대표 빅맨인 (김)종규가 왔다면 가드진에서 제가 할 일이 많아지고 선수 구성도 다른 방식으로 변화가 컸을 것이다고 생각됩니다. 저 또한 팬분들이 현재 알고 있는 박경상보다 훨씬 좋은 가드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출장시간에 따른 자신감이나 기량 향상은 물론이거니와 종규같은 빅맨과 함께 뛰게 되면 가드 입장에서도 행복한 일이거든요. 큰 키에도 워낙 잘 뛰는 선수인지라 신나서 패스도 자주 뿌렸을 것 같아요. 역으로 저에게 득점 찬스도 많이 오지 않았을까 싶고요. 그때 (하)승진이 형도 있었으니까 거기에 종규까지 더해지면 높이는 정말 끝장이었겠네요. 팀 던컨-데이비드 로빈슨의 트윈타워 시절 샌안토니오 스퍼스 가드들이 얼마나 플레이하기 편했을까 생각도 들고요.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인터뷰하면서 상상을 해보니 재미있기도 하네요.(웃음)

Q.현대모비스로 트레이드 되었을 때는 심정이 어땠나요?
데뷔팀인 KCC에서 오래 뛰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지라 트레이드 당시에는 마음이 착찹했어요. 무척 슬펐습니다. 더불어 외부적으로 알려진 현대모비스의 이미지가 훈련도 힘들고 감독님도 무섭고 분위기도 강압적이다고 알려져서 더 가기 싫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진짜 잘못 걸렸구나 싶었죠. 하지만 막상 가보니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팀 분위기가 가족같고 정말 좋았어요. 양동근, 함지훈, 박구영 등 형들이 정말 따뜻하게 잘 챙겨주셨어요. 유재학 감독님도 정말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좀더 가까이서 보면 정도 많고 부드러운 면도 적지 않으세요. 아, 밖에서본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물론 유감독님은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는지라 여전히 무서울 때는 무서우셨습니다.(웃음)

Q.어느 정도 활약을 했던 것을 보면 잘 적응했던 듯 싶어요.
그렇죠. 트레이드 첫시즌은 잘 못했어요. 그러다가 두 번째 시즌부터 출장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신감도 붙고 플레이가 잘되더라고요. 특히 대성이와 호흡이 잘 맞았어요. 제가 막 현대모비스로 갔을 때는 대성이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중간에 대성이가 미국에서 돌아왔는데 주위에서는 대성이가 오면 저에게 기회가 잘 가지 않을 것이다는 말이 많았어요. 하지만 유감독님은 저를 믿어주셨고 오히려 대성이와 함께 코트에 나서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자연스레 호흡도 잘 맞게 되더라고요. 특히 1쿼터는 고정 멤버같이 함께 뛰었는데 어느 팀을 상대로도 스코어에서 밀리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1쿼터는 이기고 들어갔다고 보면되요. 그래서 경기를 해설하던 (김)승현이 형이 저에게 붙여준 별명이 ‘1쿼터의 사나이’였어요.(웃음) 사실 전 4쿼터에도, 3쿼터에도 나가기만 하면 잘할 수 있었다고 반론하고 싶지만, 생각해보면 유독 1쿼터에 잘하기는 했어요. 당시 라건아도 있었고 최종적으로 우승도 했었는데 당시 시즌이 제 커리어에서 최고였던 것 같아요.

 


“황연주의 남편이 된 비결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Q.아이버슨 외에 꽃사슴 도둑으로도 유명합니다. 왜 그런지는 아시죠? 어떻게 만나서 결혼까지 이어졌는지 궁금합니다.

KCC 처음 왔을 때 현대건설 배구단 숙소가 바로 옆에 있었어요. 거기서 아내가 뛰고 있었는데 적지 않게 시선이 가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대학 시절부터 팬이었거든요. 그래서 순전히 아내를 보려고 배구경기를 시청하기도 했고요. 마침 저희팀 트레이너 선생님이 예전에 흥국생명 트레이너였거든요. 당연히 아내를 알고 계셨고요. 그래서 제가 트레이너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어요. 식사라도 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달라고요. 그렇게 안면을 트게 됐고 몇 년간은 누나 동생 혹은 친구같이 편한 관계로 인연을 이어갔고 이후 제가 군대가기 전에 정식으로 고백을 했고 아내가 받아주면서 연인으로 발전하게 됐습니다.

Q.황연주 선수가 워낙 인기가 좋아서 이른바 들이대는 남자들도 많았을 텐데 최종 경쟁에서 승리(?)하게 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하하핫…, 그러게요. 일단 아내가 인기가 많아서 대시하는 남자들이 많았던 것은 팩트 같아요. 운동하는 친구들은 물론 캐스터, 아나운서, MC 등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관심을 표명했다고 해요. 조건만 놓고보면 저보다 좋은 사람들도 많았겠죠. 그냥 친구처럼 편하고 그러다가 정이 쌓이고 그래서였지 않나 싶어요. 저는 본래부터 연상을 좋아했어요. 거기다가 같이 운동을 하다 보니까 서로를 이해하는 부분도 많았고요. 여러 가지로 자연스럽게 좋은 인연이 이어진 것 같아요.

Q.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이제 막 전력분석원의 길로 들어선 것이니까 배울게 정말 많아요. 아마 유망주부터 외국인 선수들에 대한 전체적인 파악 그리고 더 나아가 해외리그까지 체크해봐야겠죠. 전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분석이라는 것이 나오니까요. 시즌이 시작되면 상대팀 전술, 각 선수간 패턴도 분석해야 되고요. 아직 많이 미숙해요. 같이 일하는 형한테 많이 배우면서 하는 일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Q.오늘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경상에게 농구란 무엇일까요?
어릴적부터 함께한 친구? 그런 느낌이에요. 힘들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함께 해왔으니까 이보다 더 친한 친구도 드물겠죠. 그 동안은 현역으로서 함께 했으니 앞으로는 전력분석원의 길을 같이 가야죠. 늘 곁에 있어 고맙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고맙다. 농구야.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KBL 제공,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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