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비석 하나만 남았다, 100년전 조선인 학살한 ‘日 관동 참극’
<편집자주>
한일 관계가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다. 북한의 핵 위협, 중러 패권주의 등 전체주의의 도전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공유하는 한국과 일본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생존을 위해 한일은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그렇다고 양국의 역사에 새겨진 과거까지 잊히지는 않는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일본 도쿄 관동대지진 당시 현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학살 사건이 그중 하나다. 관동대지진 100년, 조선인 학살 100년을 맞아 시간 속에서 풍화된 아픈 역사의 흔적을 취재해 연재한다.
한낮 기온이 36도까지 오른 지난달 28일 오후 2시에 찾은 일본 도쿄 변두리 스미다구(區) 아라카와(荒川) 하천. 수십m 넘게 이어진 하천 둔덕엔 드문드문 나무 몇 그루와 함께 망초(亡草)·쑥·붉은토끼풀·갈대 같은 잡초가 무성했다. 구한말 조선이 망해갈 때 한반도로 들어와 조선인에게 ‘망초’로 불린 잡초가 핀 자리는 100년 전인 1923년 9월 100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곳이다. 학살 현장엔 죽은 영혼을 기리는 추도비는커녕 사건을 알리는 팻말조차 없었다. 이 부지가 도쿄도 소유라는 ‘점용자 도쿄도(占用者 東京都)’ 팻말만 보였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규모 7.9 강진이 도쿄를 덮쳤다. 목조가 대부분이었던 가옥은 화재에 휩싸였다. 요코하마·가나가와현·도쿄도 등 관동(關東·간토) 일대에서 10만5000명이 사망·실종하고 건물 10만9000채가 무너지고 21만2000채가 불탄 관동대지진이다.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일본 재향군인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자경단(自警團)은 군대·경찰의 묵인하에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번지자 이를 믿고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정확히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본 정부의 공식 조사나 사과 없이 100년이 흘렀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그리고 당시 일어난 주요 사건 중 하나인 아라카와 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기록이나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라카와 학살을 세상에 알린 주체는 일본 시민 단체 봉선화(鳳仙花·일본어로 ‘호센카’)였다. 1982년부터 40여 년에 걸쳐 당시 조선인 학살을 목격한 증인들의 이야기를 추적하고 기록하면서 학살의 면면이 세상에 드러났다.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 봉선화 대표는 “학살을 목격한 100여 명의 증언 가운데는 일본 군대에 의해 조선인이 살해됐다는 증언도 몇 번이나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증언이 없으면 묻혔을 진실”이라며 “증언한 사람들은 거의 똑같이 ‘이런 일은 두 번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 세상에 잘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아라카와 하천 둔덕에서 걸어 나와 3분여 걸어 주택가로 들어서자 10평(약 33㎡) 남짓한 땅에 ‘도(悼·슬퍼하다)’라고 쓰인 추도비가 나왔다. 높이 1m 정도 비석 앞에는 색동저고리를 입힌 인형과 꽃신, 국화꽃, 연꽃이 놓여 있었다. 시민단체 봉선화는 당초 학살이 벌어진 아라카와 하천에 추도비를 세우려고 했지만, 토지를 소유한 일본 정부와 도쿄도가 허락하지 않았다. 봉선화 회원들이 일본·한국 정부 어느 곳의 금전 도움도 없이 사비로 땅을 사서 2009년 추도비를 만들었다.
비석 뒷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일본의 군대·경찰, 유언비어를 믿은 민중에 의해 많은 한국·조선인이 살해됐다. 식민지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귀한 생명을 빼앗겼다. 역사를 마음에 새겨, 희생자를 추도하고 인권의 회복과 두 민족의 화해를 바라며 이 비를 세운다.’ 재일교포 2세 신민자씨는 “누구의 돈도 안 받고 사유지에 세웠기 때문에 비문에 사실을 그대로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군대·경찰의 학살’을 비문에 명기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봉선화는 학살의 증언을 모아 책과 강연 등으로 알렸다. 덕분에 아라카와의 참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곳에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도쿄에서 북동쪽으로 한참 떨어져 지진 피해가 덜했기 때문이다. 화재로 집을 잃은 피난민 2만명 이상이 아라카와 일대에 몰렸다. 아라카와 하천에 있는 ‘요쓰기(四つ木) 다리’를 건너면 지바현 등으로 멀리 피난 갈 수도 있었다. 땅을 파서 만든 방수로(放水路)인 아라카와 하천은 당시 대규모 공사 중이어서 많은 조선인이 공사 인부로 인근에 살고 있었다. 여진이 무서운 조선인들 또한 피난민들과 섞여 하천 둔덕에 머물렀다.
봉선화가 모은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비극은 지진이 난 1일 밤 시작됐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이케가미 기미코씨(이하 봉선화가 모은 증언)는 “1일 밤에 집집마다 ‘조선인이 300명이나 무리를 지어 다니니 남자들은 모두 나오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조금 이따 비명이 들렸다”고 말했다. 이런 증언들도 있다. “1일 밤 요쓰기 다리 근처의 제방으로 피난을 갔는데 조선인 소동으로 난리였다. 다음 날 같은 곳에 가보니 시체 20~30구가 있었다.”(도미야마·가명·당시 22세) “살해당한 조선인 12~13명을 봤다. 그중 2명은 여자였다. 확실히 눈으로 봤다.”(마쓰다 하루오·당시 12세)
당시 24세였던 우노 신타로씨는 “도쿄에서 온 피난민들이 ‘조선인이 (도쿄에서) 폭동을 일으켰다’고 전해줬다. 자경단이 결성돼 일본도와 죽창으로 무장해 조선인을 죽였다. 아라카와 둔덕에 있는 요쓰기 다리 근처엔 조선인 시체가 산을 이룰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9월 2~3일쯤 계엄령에 따라 일본군이 아라카와 하천 인근에 진입하면서 피해가 커졌다. 부대명을 기억하는 증언은 없었다. ‘조선인 폭동’이란 유언비어를 믿었던 일본인들이 계엄군의 진입에 ‘만세’를 불렀다는 목격담은 있다. 일본군은 요쓰기 다리 맞은편에서 총을 들고 이동을 통제했다. 천태종 모쿠보지(木母寺)의 주지승 마이즈미 미쓰타카는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단발적으로 총 쏘는 소리를 들었다”며 “군인들이 갈대밭에 숨은 조선인을 찾으면서 쏜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24세였던 오가와(가명)는 “조선인 22~23명을 제방 밑으로 내려보내곤 곧바로 뒤에서 총으로 쏴서 죽였다”며 “다들 (군인들이) 요쓰기 다리에서 (조선인을) 죽이는 것을 봤다. 여성도 두세명 있었다. 끔찍하다”고 증언했다.
학살 이후 일본 정부가 은폐한 정황도 남아 있다. 조선인 학살이 한창이던 9월 3~5일에 계엄군이 경찰서에서 일본인 노동운동가 10명과 자경단원 4명을 살해한 이른바 ‘가메이도(龜戸·사건 발생 지역 이름)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0월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됐고 유족들은 시신 인도를 요구했는데, 묻힌 장소가 조선인 학살 사건이 터진 요쓰기 다리 제방이었다. 같은 곳에 시신을 버린 것이다. 니시자키 봉선화 대표는 ‘1923년 11월 14일 자 호치신문’을 보여줬다. 제목은 ‘가메이도 사건 시체 유기의 현장을 헌병과 경찰이 통제… 유족은 유골도 못 파고 돌아왔다’였다. 그는 “당시 (논란이 커지자) 11월 12일과 14일 경찰은 두 차례에 걸쳐, 트럭까지 동원해서 요쓰기 다리 인근을 팠다. 이때 조선인 시신도 모두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며 “유족들이 ‘유골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더니 경찰서장이 ‘100명 정도 같이 묻혀 있어서 누가 누구의 뼈인지 모르니까 돌려주기 어렵다’고 답한 기사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당초 일본인 시신만 은폐하려다가 파보니 조선인 시신까지 너무 많이 나와, 14일에 다시 트럭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후일 공개된 당시 극비 문서에도 이에 대한 증거가 있다. 일본 국회도서관의 헌정 자료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문서(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을 지낸 1919~1927년, 1929~1931년 기록된 공식 문서)’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그해 12월에 각 경찰서에 보낸 ‘극비 문서’가 수록돼 있다. 지시 내용은 ‘매장한 시신은 빨리 화장할 것’ ‘유골은 일본인·조선인 구별이 안 되도록 조치할 것’ ‘기소된 사건인데 피해자가 조선인일 경우엔 빨리 유골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까지 처리할 것’ 등이다. 이런 조직적인 은폐 탓에 관동대지진에서 학살된 조선인이 몇 명인지조차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라카와 학살 현장인 요쓰기 다리는 이제 철거돼 없고 그 옆에는 기네카와(木根川) 다리가 세워졌다. 시민단체 봉선화는 다음 달 2일 기네카와 다리 아래서 추도 행사를 열 계획이다. 매년 열어온 추도식이다. 한때 수십명이었던 봉선화 회원들은 나이가 들어 몇 명 남지 않았다. 증언해줄 목격자도 이제 세상에 없다. 학살 현장에서 도쿄를 바라보면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인 높이 600m 스카이트리 전망대만 보일 뿐이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대규모 화재와 인명 피해로 불안이 확산하는 와중에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거나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후 민간인들이 조직한 자경단(自警團)이 조선인들을 죽창과 몽둥이 등으로 무차별 학살해 수많은 조선인이 사망했다. 지금까지도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상 규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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