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세이] 과학기술, 카르텔이 문제인가?
미국이 반도체법, 인플레이션 감축법, 인프라법을 발표하면서 전 세계에 과학기술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세계가 벌이고 있는 기술 패권경쟁 속에서 한국은 퍼스트 무버는 못되더라도 퍼스트 그룹에 속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생존의 열쇠인 미래기술 선점은 더욱 요원해졌다. 이는 지난 6월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발언한 ‘연구개발(R&D) 카르텔’에서 비롯된다. 대통령 발언 이후, 지난 10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산하 정부출연연구기관(정출연)에 주요 사업비를 25% 삭감한 예산안을 통보했다. 일부 과학기술단체는 내년 예산이 70%까지 삭감될 거라는 얘기도 들려 활동에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기본 사업비는 연구자들이 국가과학기술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예산이다. 단기성 연구만 생산해 내는 과제중심제도(PBS)에 휘둘리지 않고 연구자들이 중장기·대규모 미래 기술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시드머니이다. 이번 삭감으로 연구자들은 PBS에 더욱 내몰리게 되면서 과학기술의 저성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현 정부는 취임식부터 국정운영의 중심에 과학기술을 놓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공공기관 혁신안을 시작으로 운영비 삭감, 기관 기본 사업비 삭감, 일괄 국제협력 과제 요구, R&D 이권 카르텔, 과기부처 지배구조까지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대며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가고 있다.
국가 재정이 빈약하면 예산 삭감 1순위가 과학기술 R&D였다. 정부는 R&D의 본질적 특성을 무시한 채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을 앞세워 출연연에 간섭하고 통제해왔다. 연구자들은 정당한 절차와 경쟁을 통해 연구 과제를 수주해왔다. 대체 어디에서 카르텔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이종호 과기부 장관은 낭비성 예산을 효율화해 건전한 재정에서 R&D를 키워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R&D 특성을 배제하고 운영 자율성도 빼앗은 채로 정권과 정부부처 관료가 교체될 때마다 시스템을 뜯어고치고 행정편의주의 규제를 강화해 오면서 정출연은 방향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비효율적 운영이 있었다면 정부의 정책과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총괄적인 혁신 정책을 개발하기보다는 (정부부처 간) 예산을 재조정해 새 우선순위에 대응하는 식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달 발간한 ‘OECD 혁신 정책 리뷰: 한국 2023년’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의 과학기술 혁신 정책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한국 경제에 ‘퀀텀 점프(대도약)’가 필요한 현시점에서 과학기술과 경제발전을 아우를 국가 개발 로드맵이 없다는 점을 짚었다.
국제공동연구 확대 지시에서도 현 세계정세를 읽지 못하는 정부를 볼 수 있다. 국제협력연구는 돈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상호보완적 자산이 없으면 공동연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국제 공동연구가 비슷한 수준에 있는 국가끼리 폐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금과 같은 기술보호주의 시대엔 더 말할 것도 없다. 국제협력을 하려면 상대와의 깊은 교감과 신뢰, 치밀한 사전 전략,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제도가 요구되는 이유다.
“인공지능(AI) 암흑기일 때 정부가 미래를 내다보고 연구개발을 지원했다.” 대통령 일행이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전 구글 부사장이자 현 토론토대 교수인 제프리 힌튼이 한 말이다. “AI 강국 캐나다의 성공 요인이 안정적·장기적 투자에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말하기까지 한 현 정부의 작태는 자신들이 뱉은 말을 뒤집는 형국이다.
제프리 힌튼 교수의 말은 미래기술 선점을 위해 국가가 할 일을 잘 꼬집어 준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단기간 안에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는 대규모 원천기술인 국가 미래 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미션을 부여받는 정출연의 존재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자원 집중 투하를 바탕으로 세계가 기술경쟁을 펼치는 가운데 국가 R&D 홀대는 한국 경제의 퇴보를 앞당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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