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오후 4시의 저녁 식사
우리 집은 건식 욕실을 쓰고 있다. 물이 빠져나갈 배수구는 없지만 대신 진공청소기로 한 번에 청소할 수 있어 간편하다. 상쾌한 주말 아침.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 갔는데 소변이 잔뜩 묻어 있는 변기에 앉고 말았다. 바닥에는 속옷이랑 수건이 널브러져 있다. 범인은 아들이다! 너무 화가 나 당장 물로 청소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확인하니 이번엔 물난리가 났다. 안방으로 물이 넘치기 일보 직전이다. 다시 화가 치밀어 올라서 소리를 지르니 아들은 쏜살같이 자기 방으로 피신했다. 내가 너무 흥분했나 싶어서 “아드님, 화장실의 물을 수건으로 닦고 깨끗이 건조하기 바랍니다. 수건은 물을 닦은 후에 빨래통에 넣기 바랍니다. 이따 외출 다녀와서 확인하겠습니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이번엔 무언가 알아듣는 게 있겠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통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리 세대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요즘 친구들에겐 당연하지 않아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신입 사원이 저녁 식사 비용으로 4시에 회사 근처에서 먹은 차와 케이크를 청구했다. 같이 분개했다. 저녁이라면 적어도 6시 이후에 먹은 걸 청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친구가 물었다. 회사에 저녁 식사는 6시부터라는 규정이 있느냐고 말이다. 또 그걸 그에게 알려줬느냐고 했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을 때 그건 지켜야 할 규범이 아니고 오히려 이용해야 할 회사의 복지 제도가 된다는 것이다. 야근했는데 살을 빼기 위해서 저녁을 4시에 먹었다고 말해도 할 말이 없다는 거다. 다 알 거라고 속단하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외출했다가 집에 오니 아들이 욕실 물을 닦고, 물기 마르라고 선풍기도 틀어놨다. 그런데 손을 씻고 닦으려고 보니 수건이 하나도 없다. 아들이 10개나 되는 수건을 몽땅 화장실 바닥 물을 닦고 빨래통에 넣은 탓이다. 갈 길이 멀지만 하나의 진전은 있었노라. 드러내 물어보고 상호 합의하지 않은 무언의 합의는 힘을 잃을 수도 있다. 시키는 사람은 왜 이런 것도 모를까 억울하고, 지시를 받는 사람은 도대체 무얼 하라는 건지 제대로 말도 안 하고 자기에게 화를 내니 억울하다. 아들을 보니 억울함이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화내기 전에 충분히 소통했는가 돌아볼 일이다. 억울함이 의외의 곳에서 풀릴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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