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만들어진 적

2023. 8. 21.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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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日 투하로 냉전시대 시작
쓸모를 다한 오펜하이머 제거돼
권력 유지를 위해 적을 만드는
불온한 역사 되풀이돼선 안 돼

불안한 권력은 적을 창조한다. 없는 적을 만들어 내부의 저항을 그 적에게 투사한다. 국민의 관심은 분산되고 권력은 유지된다. 그 과정에서 희생양이 발생한다. 일련의 마녀사냥과 희생 제의로 내부는 평화로운 것처럼 잠잠해진다. 만들어진 적은 내부의 긴장과 불평등, 불안을 숨기는 연막이 된다.

영화 ‘오펜하이머’ 이야기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영화가 아니라 정치영화였다. ‘오펜하이머’가 좋은 정치영화인 이유는 오펜하이머에 집중하지 않고 그를 둘러싼 정치적·군사적 상황과 맥락, 변수를 끊임없이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변수들의 장면화가 오펜하이머를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의 총책임자였다. 나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연구가 시작됐지만 원폭은 정작 독일에 사용되지 않았다. 히틀러가 사망했고 독일은 항복했다. 폭탄 연구의 애초 명분이 사라졌다. 또 다른 명분이 필요하진 않았다. 연구가 대규모로 시작될 때부터 폭탄 개발은 기정 사실이었다. 더 빨리 전쟁을 끝내서 죽어 나가는 젊은이를 구해야 한다는 인류애를 강조하면 원폭 개발을 둘러싼 도덕적 딜레마는 충분히 유지되었다. 도덕적 딜레마를 강조하면 할수록 원폭 투하는 정당화될 수 있다. 도덕적 딜레마로 선택된 ‘차악’은 다른 대안이 없음을 끝없이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도덕적 딜레마는 오펜하이머가 핵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본질적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독일이 인류를 패망시키는 최악을 막기 위해 핵을 개발한다고 믿어야지만 더 이상의 죄의식 없이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덕적 딜레마는 연구를 못 하게 만든 장해가 아니라 연구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셈이다.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고, 소련은 점차 그 힘을 키워 가고 있었고, 복잡한 전세와 정세 속에서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막는 대책이 필요했다. 그 대책이 바로 일본 원폭 투하였다. 미국은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소련과의 경쟁으로 상황을 전환했다. 원폭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일본에 떨어졌으며, 이로써 미국은 소련을 이기게 됐다. 이 결말은 냉전의 시발점이었고,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었다.

냉전과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미국의 편집증적인 불안은 매카시즘으로 이어졌다.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Better dead than red)”는 선동 속으로 국민의 불안과 저항이 빨려 들어갔다. 오펜하이머도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됐다. 오펜하이머는 대중의 환호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사람이다. 대중의 양가감정은 팬덤의 기본 조건이다. 공산주의와 관련된 그의 전적은 그를 희생양으로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됐다. 영향력 있는 인물에 대한 가장 혹독한 처치는 그를 죄인으로 몰아 벌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수순은 그를 순교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순교자 스토리는 신화로 승격되고 정권에 방해가 된다. 매카시즘은 오펜하이머를 대중의 시선에서 몰아내 잊히게 했다.

오펜하이머의 적은 파시즘도, 일본도, 소련도 아닌, 미국의 권력이었던 셈이다. 오펜하이머는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는 이용되었고, 잘 이용되었으므로 축출될 수밖에 없었다. 성공했기 때문에 그는 희생자가 됐다. 그의 나르시시즘은 희생을 더 앞당겼다. 힌두 경전을 인용, 자신을 지칭하여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폭탄 파편에 썼던 것, 트루먼 대통령에게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한 것은 분명 자신에 대한 과잉 해석이었다. 그는 혼자서 원자폭탄을 개발한 것이 아니며, 원폭을 투하하여 피를 묻힌 자는 트루먼이었다.

그의 도덕적 딜레마는 원폭을 개발할 수 있게 했고,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게 했으며, 자신을 프로메테우스로 환치하는 동력이 되었다. 도덕적 딜레마를 견지하며 스스로에 대한 박해자가 된 사람에게 ‘최선’이란 없다. 그는 늘 ‘차악’을 선택하고, 차악의 명분에 빠졌다. ‘차악이다, 다른 대안이 없다’는 말은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오펜하이머’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은 이 주인공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았다. 영화는 차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오펜하이머를 보여 주면서 그 차악의 선택이 난제를 가장 손쉽게 회피할 수 있는, 반대편조차도 빠르게 설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을 차단해 버리는 빌미일 수도 있음을 보여 주었다.

원폭은 떨어졌고 연쇄 반응이 일어났다. 미소 냉전이 시작됐고, 6·25 전쟁이 터졌다. 남북한이 분단되었고, 동아시아는 늘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됐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으로 신냉전이 시작됐다. 한·미·일 관계 강화도 여기서 파생됐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이분법 구도는 ‘동맹’ 안에 내재된 근본적인 긴장과 모순을 가린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그 ‘동맹’이 가리고 있는 갈등의 한 단면이다. 한·미·일 정상회담의 정례화 약속은 삼국 사이에 긴장이 없을 것 같은, 영원한 안정이 약속된 것 같은 착시를 만든다.

남북한의 적절한 긴장은 남한을 국제적 중재자·협상가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한·미·일 관계 강화는 남북한 긴장을 전략적으로 조율함으로써 얻게 된 한국의 자율성과 영향력을 스스로 반납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18일 이전과 이후로 나뉠 거라는 드라마틱한 선언이 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권력 유지를 위해 냉전을 이용하고 적을 만든다는 가정은 불온하다. ‘오펜하이머’는 이런 불온한 생각을 견인하는 영화였다. ‘동맹’과 ‘평화’라는 정치적·외교적 수사에 대해 거듭 시차(parallax view)를 만드는 모호하고 강한 영화였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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