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사별자의 나라]극단적 선택, 자살의 대체어로 도입됐지만 정형화돼 이제는 더 높은 기준 마련해야
‘악성신고로 극단선택 시도한 선생님 살린 건… 학부모’
<한겨레21> ‘뉴스 큐레이터’ 기사 제목 ‘훈육이 범죄가 되지 않게만’(제1476호)의 온라인 제목이다. ‘극단선택’. 한국 언론은 자살 사건을 보도할 때 ‘자살’이라는 직접적인 말 대신 ‘극단적 선택’ ‘극단선택’이란 표현을 주로 쓴다. 이 말은 엄밀한가. 오해나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나.
자살을 ‘극단적 선택’으로 바꾼 역사적 맥락
극단적 선택은 현재 사실상 자살의 대체어로 쓰인다. 이 구절은 우리 언중의 평소 생활에서 다른 쓰임이나 해석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라는 조어 취지와 달리, ‘여러 선택지 가운데 자살자 본인이 택한 가장 극단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살이 자살자의 의지와 선택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 유명인들의 자살 사건이 발생하고 무분별한 자살 보도로 ‘베르테르 효과’(존경하는 인물이나 유명인이 자살할 경우 유사한 방식으로 자살이 잇따르는 현상)가 일어났다. 이후 자살 관련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보도를 자제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졌다. 한국기자협회는 2004년 세계보건기구(WHO)의 권고를 받아 자살보도 권고기준(1.0)을 만들었고, 이후 2013년(2.0)과 2018년(3.0) 두 차례 개정해 시행하고 있다. 이 기준은 언론이 기사 제목에 ‘자살’이란 용어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당시 한국자살예방협회가 드라마 <모래시계>의 고 김종학 피디(PD) 사건 보도에서 ‘김종학 PD 고시텔서 자살’이란 기사 제목을 나쁜 예로, ‘드라마 거장 김종학의 모래시계 멈추다’를 좋은 예로 든 게 대표적 사례다.
이 덕분인지 극단적 선택이란 용어는 한국 언론계의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2013년 기준에서 ‘자살이란 단어를 자제’하자고 하고, 2018년 다시 ‘사망’ ‘숨지다’ 등 중립적 표현이 대안으로 제시됐는데, 사망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할 대체어가 명확히 제시되지 않다보니 오히려 극단적 선택이 더 정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자살 관련 보도는 자제되고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와 달리 단순히 자살이란 단어를 극단적 선택이 대체한 것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살에 대한 편견만 심화했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다시 ‘자살’로 쓰자는 까닭은
책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2022)을 쓴 나종호 미국 예일대학 교수는 자살을 ‘선택’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사람들은 흔히 자살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이기적이란 편견을 가지고 있다. 자살을 선택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러한 편견을 강화시킬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며 “자살 생존자들에게 시도 당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질문하면, 십중팔구는 자살 생각에 너무나 강하게 사로잡혀 있어 정상적 사고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자살 명령 환청을 들었다는 환자도 있다. 그래서 자살을 시도했지만 결국 살아남은 사람 대부분은 역설적이게도 살아 있음에 안도한다”고 설명했다. 자살 고위험군은 본인 의지와 달리 자살에 내몰린 것이며, 이를 선택으로 보게 되면 이들이 자살 생각이나 자살 시도를 숨기게 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을 기회를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나 교수는 “‘극단적 선택’이란 용어는 어찌 보면 자살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우회하려는 자세가 반영된 신조어일지 모른다. (사회가) 자살에 관해 떳떳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관련 전문가들이 모인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에 설치된 ‘자살위기극복 특별위원회’도 2023년 4월 극단적 선택이란 용어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아 기자협회의 자살보도 권고기준 개정을 제안하기로 했다. 특위가 내세운 핵심 메시지는 ‘자살은 결코 선택일 수 없다’는 것이다. 특위는 극단적 선택 같은 오해를 낳는 표현 대신 차라리 자살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쓰되, 자극적 보도를 지양하는 신중한 태도를 주문하자는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관련 논의에 참여한 유현재 서강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중요한 건 용어 선택의 문제보다는 기자와 매체의 보도 태도”라며 “20년가량 극단적 선택이란 용어를 써오는 과정에서 자살에 대한 우리 언론의 고민이 대중에게 충분히 알려졌다고 생각한다. 그 맥락을 이해하면서 한국 언론이 자살을 대하는, 한 단계 더 높은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자살사별자’ ‘자살 생존자’가 말하는 진실
극단적 선택이 한국적 맥락이 담긴 독특하고 익숙한 표현인 반면, ‘자살사별자’나 ‘자살 생존자’는 반대로 우리에겐 낯선 표현이다. 일반적으로는 ‘자살 유족’이란 말이 더 흔히 쓰인다. 하지만 영미권 등에선 한 사람의 자살이 단순히 혈연으로 묶인 가족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란 취지에서 ‘자살사별자’(Suicide Bereaved), ‘자살 생존자’(Suicide Survivor)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 친구나 동료, 이웃, 지인 등 중요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자살로 떠나보낸 모든 사람을 아우르려는 취지다. 다만 자살 생존자라는 표현이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살아남은 사람’이란 의미와 헛갈릴 수 있어 ‘Suicide Loss Survivor’(자살 사별 생존자)라는 표현도 쓴다. 한국에선 2016년 한국자살예방협회 등을 중심으로 조금씩 자살사별자란 표현을 쓰지만 충분히 알려지진 않았다. 책 <우리는 모두 자살 사별자입니다>(2020)를 쓴 고선규 한국심리학회 자살예방위원장은 “중요한 건 한 사람의 자살이 혈연관계의 가족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며, 훨씬 다양한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식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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