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 칼럼] 숙의 민주주의와 선거제 개혁
민심과 역사. 정말 어려운 화두다. 1년 전 이 지면에 쓴 ‘민심과 역사’라는 글에서 지적했듯이, 윤석열 대통령처럼 “나는 역사적 소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여론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소명주의’에 빠지면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여러 문제에도 민심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민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대중이 중요 사안에 대한 필요한 정보들을 습득하고, 이에 기초해 올바른 판단을 하기에는 여유와 시간이 없고 감정적 판단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단기적으로 그러하다. 따라서 ‘민심 지상주의’ ‘대중 추수주의’도 소명주의만큼 위험하다.
요즘 같은 포퓰리즘 시대에는 특히 그러하다. 국민의힘이 주장하고 있는 국회의원 수 축소가 그 예다. 이는 국민들의 정치혐오에 기생하는 대표적인 대중 추수주의 정책으로 한국 정치를 고민한 사람이라면 들고 나오면 안 되는 정책이다.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미국을 예로 들어 한국 국회의원 수가 너무 많다고 주장했는데, 연방제인 미국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한국 국회의원 수는 인구 비례로 볼 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네 번째로 적다. 인구가 비슷한 나라들과 비교할 때도 의원 수가 절반 이하다.
주목할 것은 ‘숙의 민주주의’다. 이는 대중들이 정책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충분한 숙의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으로, 민심에 기초하되 대중 추수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다. 국회가 선거제 개편에 대해 지난 5월에 실시한 숙의 민주주의 실험은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주목해야 한다. 국회는 권역별·성별·연령별 비례에 따라 유권자 대표를 뽑아 선거제도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 뒤 패널 토의, 전문가 질의응답, 분임토의, 재숙의 과정을 거쳐 다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대중에게 충분한 정보와 숙의과정을 제공하는 경우 전문가들과 같은 ‘올바른’ 판단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대중들은 국회의원 수 확대와 비례대표 확대에 비판적이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습득하고 숙의과정을 거치자 대다수의 전문가처럼 국회의원 수와 비례대표 확대에 우호적이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비례대표를 확대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숙의절차 전에는 27%에 불과했지만 숙의과정을 거친 뒤 70%로 43%포인트 늘어났다. 10명 중 7명이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제에 기초해 있지만, 승자가 독식하는 단순다수결제인 우리 선거제도 때문에 수많은 사표가 발생하고 있다. 표의 가치가 2배 이상 벌어지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사표 때문에 ‘소수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표와 거대 양당에 투표하는 표의 가치 차이가 7배까지 확대돼 있다. 이 같은 현실을 안다면, 비례의석 확대를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회의원 수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 수를 늘어야 한다는 사람은 숙의 전 13%에 불과했던 것이 숙의 후에는 33%로, 국회의원 수를 현상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18%에서 29%로 늘어났다. 반면에 정치혐오에 기초해 ‘국민적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의원 수 축소는 65%에서 거의 절반 수준인 37%로 크게 줄었다.
정치권은 자신들이 실시한 숙의 민주주의 결과를 수용해 비례대표 확대, 가능하다면 국회의원 수 확대에 나서야 한다. 핵심은 비례의석 확대이다. 다만 현역 의원 지역구를 생각할 때 국회의원 수 확대 없는 비례대표 확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관련 예산이 늘어나지 않도록 국회의원의 보수와 특권 축소를 전제로 국회의원 수 확대도 추진해야 한다. 위성정당도 금지해야 한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패스트트랙까지 동원해 준연동제를 관철시켜놓고도 이를 주도해 그 정신을 짓밟은 것에 대해 오죽했으면 동료였던 유인태 전 의원이 공개적으로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 힐난했고 헌법재판소도 통제가 필요하다고 했겠는가?
문제는 정치권이다. 국민의힘은 함께 추진한 숙의 민주주의 결과에 대해 말도 되지 않는 시비를 걸고 있다. 다행히 더불어민주당은 이에 우호적이다. 다만 대선에서 정치교체를 역설했던 이재명 대표가 선거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선거제 개혁에 침묵하고 있고 절대 다수 의석을 갖고도 준연동제 때처럼 힘을 싣지 않고 있다. 기대할 것은 선거제 개혁을 자신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밝힌 김진표 국회의장이다. 그가 정치력을 발휘해 숙의 민주주의 결과를 입법화하기를 기원한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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