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본소득, 필요한 건 증거보다 정치적 의지
현재 미국 작가노조는 배우노조와 함께 100일 넘게 파업 중이다. 노조는 제작사에 공정한 수익 분배와 인공지능(AI) 사용 규제를 요구한다. 제작사는 생성형 AI에게 대본을 쓰게 하고 AI 배우를 만들어 작품 제작 비용을 줄이려 한다. 작가와 배우들은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느낀다.
최근까지 할리우드 작가와 배우는 AI가 대체하기 가장 힘든 직군으로 여겼다. 노동의 창의적 특징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AI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직군은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고용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AI 자동화로 전체 일자리의 27%가 직접적 위험에 처했다. 기술이 고용에 가하는 충격에 사회적 완충장치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바라는 한 가지 이유다.
다른 이유는 더 근본적이다. AI 발전은 사람들이 제공하는 대규모 데이터에 기반을 둔다. 그러면 발전의 결실에서 일정한 몫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돼야 하지 않을까? 기본소득은 디지털 혁신으로 더욱 양극화한 분배 시스템의 부분 교정을 넘어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제안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긍정적 효과가 나타날까? 이를 알고자 세계 곳곳에서 수년간 100개가 넘는 기본소득 실험을 실시했다. 모든 실험에서 참가자의 건강, 교육, 사회관계, 경제활동 참여 정도가 개선됐다. 기본소득 이론의 석학 가이 스탠딩 교수는 “정부가 ‘증거 기반 정책 수립’에 진심이라면 이미 기본소득제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기본소득 도입을 주저하는 건 증거가 아닌 정치적 의지가 부족해서다.
23일부터 서울 이화여대에서 ‘제22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가 열린다. 세계 기본소득 실험에서 확보한 증거를 검토하고, 기득권 장벽을 넘어 기본소득을 도입할 전략을 논의한다. 대회에는 23개 국가에서 300여명의 기본소득 연구자와 활동가가 모인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창립 멤버인 필리프 판 파레이스, 미국 스톡턴 첫 흑인 시장이며 ‘보장소득’ 정책을 이끄는 마이클 터브스도 참여한다. 이들과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 등 한국 정치인, 청년 활동가들이 토론한다.
대회 주제는 ‘현실 속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 개념조차 낯설게 느낀 때에 비해 기본소득 운동은 놀랍게 발전했다. 기본소득은 먼 ‘이상’에서 제도권 ‘현실’로 들어왔다. 이에 많은 질문이 제기된다. 기본소득 본연의 이상을 놓치지 않으면서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가? 기후위기와 자산 불평등 문제에 기본소득은 효과적인 해법이 될 것인가? 여전히 강한 정치적 반대를 극복할 설득 방법은 무엇인가? 대회 수십 개 세션에서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AI 자동화가 드리우는일자리 없는 미래의 공포, 각자가 원하는 활동을 선택하는 ‘결핍 없는 사회’의 희망….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바라는 이유는 다양하다. 중요한 건 지금의 불안정과 불평등을 그대로 두고는 공동의 미래를 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번 대회는 지속 가능한 공동의 미래를 탐색하는 자리다.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바란다.
오준호 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사명이 있는 나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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